토론:이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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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5년 전 (메이님) - 주제: 2018년 5월 19일의 편집 요청

2018년 5월 19일의 편집 요청[편집]

이달영 (토론) 2018년 5월 19일 (토) 19:47 (KST) 쌍매당 이첨에 대한 위키백과의 내용을 보완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첨의 본관인 신평이씨 대종회 전종사실장으로 우리 조상의 사전내용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싶습니다. 수차 편집을 시도하였으나 이곳 편집에 익숙치 않아서인지 계속 오타가 나고, 또 편집된 내용이 사라지고 급기야는 이 페이지가 보호처리되었습니다.(저로 인하여) 편빕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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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6일의 편집 요청[편집]

年譜(연보)

[雙梅堂篋藏集(쌍매당협장집)의 雙梅堂年譜(쌍매당연보)를 기준 함] 

▪1345년(충목왕 원년) 12월 공이 태어나다.쌍매당의 관향지는 홍주목의 속현 신평현으로, 출생지는 洪州牧 結成縣으로 보고 있는 見解와, 신평현으로 보고 있는 見解가 있다.

▪1365년(공민왕 14년 乙巳 21세) 윤 십이월 恕齋(서재) 韓蕆(한천)이 주관한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恕齋韓藏掌試進士 第二名)21세 때인 1365년 시험관으로 전리판서(典理判書)인 서재(恕齋) 한천(韓蕆)에 의하여 易書法에 의한 國子監試에 99명 중 진사2등으로 합격했다. ⁎易書法[과거에서 시권(試券)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리(胥吏)를 시켜 주필(朱筆)로 바꾸어 쓰던 제도]에 의한 과거가 1365년(공민왕 14)처음 실시되었다.

▪1368년(공민왕 17년 戊申 24세) 4월 임금이 과거장에 몸소 나와 시험을 관장하고 성적을 메기고 목은 이색이 讀卷官(독권관)으로 참여한 고려시대 과거의 최종시험인 예부시에서 장원하다. (夏四月 上親試 牧隱李文靖公穡叅掌禮闈 中 第一名 高麗史 卷四十一 世家 卷第四十一 恭愍王 17年 4월 9재에서 이첨 등을 급제시키다. (1368년 4월 12일 음력)壬子 幸九齋, 賜李詹等及第. ⁎독권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或者(혹자)는 公이 이색의 門生(문생)이라하거나, 정몽주의 門生(문생)이라 하기도 하나 李穡(이색)은 公이 장원한 親試(친시)에 讀卷官(독권관) 과거에서 응시자가 제출한 답안지를 읽고 그 내용이 잘 되었는가를 왕 앞에서 설명하는 직책. 일 뿐이었고 존경하는 선배학자이고, 정몽주는 1337년생으로 公보다 8살 연상의 고려의 중흥을 위해 이성계에 대항하는 뜻을 같이하는 아주 가까운 동지였을 뿐이다.(필자 註) 윤 7월에는 정9품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秋閏七月 拜藝文檢閱1308년(충렬왕 34) 처음으로 예문춘추관에 정9품의 검열 2명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5) 예문춘추관을 한림원(翰林院)과 사관(史館)으로 분리 개편할 때 두 곳에서 각각 정원 1명의 정8품 검열을 두었다. 승지와 더불어 왕의 측근에서 일하는 근시(近侍)로 지칭되며, 사실(史實)의 기록과 왕명의 대필 등을 맡았으므로 사신(史臣)이라고도 한다. 또 같은 예문관 관직인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과 함께 8한림(翰林)이라 하였으며,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직한 요직이었다. ·九齋(구재): 성균관을 말한다. 홍건적 침입 후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는데, 그 개혁정책 중 하나가 임박(林樸)의 건의로 옛 숭문관(崇文館)의 자리에 성균관을 중창하고 6재를 9재로 바꾼 것이다. 허흥식, 《고려 말 과거제도의 개혁》《고려과거제도사연구》,1981, 49~49쪽. 신천식,《중앙의 교육기관》《한국사》17, 국사편찬위원회, 1994. ) ▪1369년(공민왕 18년 己酉 25세) 1월에 정8품 예문관수찬이 되었다.(春正月 拜藝文修撰) 가을 7월에 정7품 예문공봉이 되었다.(秋七月 拜藝文供奉) 12월에 정6품 조청랑우정언지제교가 되었다.(冬十二月 朝請郞右正言知製敎右正言: 백규서무(百揆庶務)를 관장하고 그 낭사(郎舍)는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맡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한 정6품의 관직, 知製敎:왕에게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한 관직. 이 무렵에 공민왕은 그 자신이 직접 주관하는 과거에서 장원한 쌍매당에게 리어도(鯉漁圖: 잉어그림) 한 폭을 그려 손수 하사하니, 쌍매당도 ‘어필이어도찬(御筆鯉漁圖贊)’을 지어 사례하였다.

▪1371년(공민왕 20년 辛亥 27세) 6월에 수시중 이인임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리고, 폄관(貶官)되어 조정랑 지춘주사겸 권농방어사가 된다. (夏六月 拜朝請郞知春州事兼勸農防禦使)

여름 6월 헌납(獻納) 이첨(李詹)을 폄관(貶官)하여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삼고, 정언(正言) 전백영(全伯英)을 폄관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삼았다. 이첨 등이 상소하여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을 죽이자고 청하기를, “시중(侍中) 이인임이 음밀히 김의(金義)와 더불어 모의하여 천자의 사신을 죽였는데도 요행스럽게 죄를 면하고 있으니, 이는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갈고 마음속으로 분통하는 것입니다. 오계남(吳季南)은 정료위(定遼衛)의 사람을 제멋대로 죽였으며, 장자온(張子溫)은 김의가 사신을 죽였다고 정료위에 고하지 않았으니, 죄를 마땅히 추국(推鞫)하여야 될 것인데, 이인임이 내버려 두고 말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근래에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이 서북면(西北面)에 나가 진수(鎭守)하면서 김의의 서찰을 얻고도 상달(上達)하지 않고 비밀히 이인임에게 주었다가 전하께서 여러 번 찾은 연후에야 아뢰고는 ‘백성들의 들음을 의혹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핑계하였으니 그 죄가 두 가지이며, 호서(胡書, 북원(北元)의 조서(調書)가 왔을 때 지윤이 그 글을 베끼어 그들이 말한 중요 부분을 삭제하고 전하께 올리며 그 호서는 이인임에게 주었는데, 이인임이 즉시 올려 아뢰지 않았으니 그 죄가 세 가지이고, 백관(百官)과 더불어 함께 맹세하여 ‘오로지 전하만을 섬기겠다’는 뜻을 보이고는 호(胡, 북원)와 더불어 통하여 심왕(瀋王)에게 공을 세워 다른 날의 화를 면하려고 이랬다저랬다하며 간사한 짓을 하였으니, 그 죄가 네 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며 변(變)을 선동하여 장차 닥칠 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청컨대 이인임과 지윤을 목베고, 또 오계남과 장자온의 죄를 바루어 기강(紀綱)을 떨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소장(疏章)이 올라가매 좌죄 폄관(坐罪貶官)된 것이었다.[동국통감 권50 고려기(東國通鑑 卷50 高麗紀)]

▪1374년(공민왕 23년 甲寅 30세) 겨울 12월에는 정6품 승봉랑좌정언지제교가 되어 다시 조정에 돌아오다. (冬十二月 拜承奉郞左正言知製敎)

▪1375년(우왕 1년 乙卯 31세)가을에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 우인열(禹仁烈), 친종호군(親從護軍) 한이(韓理)가 인임에게 아부하여 간관이 재상을 논핵했다하여, 하동으로 유배되고 1377년에 종편되었다. (秋以言事貶河東丁巳年從便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

우인열(禹仁烈), 친종호군(親從護軍) 한이(韓理)가 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간관이 재상을 논핵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명백히 판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자 진술하는 말이 정당문학 전녹생(田祿生)과 박상충에게 관련되었다. 최영이 매우 참혹하게 녹생과 상충을 국문하였다. 인임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을 죽일 것은 없다." 하고, 귀양보냈는데, 녹생과 상충은 모두 길에서 죽었다. 이첨ㆍ전백영ㆍ방순(方旬)ㆍ민중행(閔中行)ㆍ박상진(朴尙眞)은 곤장을 때려 귀양 보내고, 또 정몽주ㆍ김구용(金九容)ㆍ이숭인ㆍ임효선(林孝先)ㆍ염정수(廉廷秀)ㆍ염흥방(廉興邦)ㆍ박형(朴形)ㆍ정사도(鄭思道)ㆍ이성림(李成林)ㆍ윤호(尹虎)ㆍ최을의(崔乙義)ㆍ조문신(趙文信) 등이 자기(이인임)를 해하려고 모의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보냈다. 상충은 강개하고 큰 뜻이 있고, 널리 배워서 글을 잘 지었으며, 겸하여 성명학(星命學)에 통달하였고, 그 행실과 벼슬에 있어서 반드시 도리대로 하여 의롭지 못한 부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고려사절요 제30권 신우1(辛禑一)을묘 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년)

⁎협장집의 연보 중〈洪武八年乙卯 秋以言事貶河東丁巳年從便 夏四月。拜奉直卽,右獻納。依前知製敎。六月。拜左獻納,知製敎。賜紫金魚袋 자금어대: 금어대(金魚袋)란 붕어모양으로 만든 금빛 주머니로서 벼슬아치들이 띠에 차게 되어 있었다. 금어대 중에서도 자색은 높은 표징이었고, 금어 아래에는 은어가 있었다. 주머니 속에 성명을 적은 표언(標言)이 있어 일종의 면책 특권이 있고 궁중에 드나들 수도 있었다. 황궁에 드나들 수 있는 포상 물로 물고기 모양의 조각을 말하며 이 조각을 두 쪽으로 나누어 왼쪽 것은 궁중에 두고 오른쪽 은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거기에 관등성명을 새겨 궁중 출입 시 조각을 맞추었다고 한 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시작되어 명나라 때 없어 졌으며 우리나라는 발해와 고려 때 약간 동안 사용 했다 한다. 〉부분은 쌍매당이 1377년 하동에 유배되었다가 종편된 후, 10여 년간 경상도 일대를 돌며 이후 야인생활을 한 후 (1383~4년 우왕 9~10년) 정지(鄭地:1347-1391)장군을 따라 왜전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4월 종편 후 6월 우헌납과 지제교를 제수 받았다는 내용은 時期에 대한 詳考(상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註]

▪1384년(우왕 10년 甲子 40세) 가을 7월에 봉선대부 시전교부령이 되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秋七月 拜添奉善大夫 試典敎副令)

▪1388년(우왕 14년 戊辰 44세) 이인임 임견미 일파가 최영에 의하여 정월에 정계에서 숙청당하자, 정월에 봉상대부 내부부령예문응교가 되었다. (春正月 拜奉常大夫內府副令藝文應敎), 2월에는 정4품 예문관응교로 예전의 지제교겸성균직강이 된다. (二月 拜藝文應敎依前知製敎兼成均直講) 8월에는 정4품(상) 봉상대부문하사인지제교겸춘추관편수관이 된다. (秋八月 拜奉常大夫門下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12월에는 봉상대부전리총랑진현관직제학겸성균직강이 되고 다시 봉상대부전리총랑지제교에 제수되었다. (冬十二月 拜奉常大夫典理摠郞進賢館 進賢館:고려 시대, 학식이 풍부한 문신들을 뽑아 학문을 연구하고 임금을 보좌하게 하던 관전(館殿). 1298(충렬왕 24)년에 설치하였다. 直提學兼成均直講 又拜奉常大夫典理摠郞知製敎) 당시 고려의 정세는 3월에 최영이 요동진공계획을 수립하고 8도에 군사를 징집하면서, 왕족들은 모두 한성으로 피난시키고, 우현보(禹玄寶)로 하여금 개성을 지키게 하고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삼아 5월에 출전하고 6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한다. ⁎협장집의 연보 중 봉상대부는 고려 시대 문관(文官) 정4품의 품계 명으로 충렬왕 34년(1308)에 정했는데, 공민왕 5년(1356)에 중산대부(中散大夫)로 고쳤고, 동왕 11년(1362) 이 이름으로 환원하고 동왕 18년(1369)에 다시 정4품의 상(上)으로 하여 중산대부(中散大夫)로 고쳤으므로 여기서는 중산대부이다.(필자註)

▪1389년(공양왕1년 己巳 45세) 6월에는 종3품(하) 중현대부 시사헌집의 진현관직제학이 된다. (夏六月 拜中顯大夫 試司憲執義 進賢館直提學) 12월에는 정3품(하) 봉순대부성균대사성진현관직제학지제교가되고, 다시 정3품(상) 정순대부우상시보문각직제학지제교겸춘추관편수관경연강독관이 된다. (冬十二月 拜奉順大夫成均大司成進賢館直提學知製敎 又拜正順大夫右常侍寶文閣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經筵講讀官)

▪1390년(공양왕 2년 庚午 46세) 3월에는 종2품(하) 봉익대부 공조판서보문각직제학지제교가 된다. (春三月 拜奉翊大夫工曹判書寶文閣直提學知製敎) 12월에는 정순대부밀직사좌부대언경연참찬관겸판종부사사 상서윤진현관직제학지제교 춘추관지병조사가 된다. (冬十二月 拜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經筵叅贊官兼判宗簿寺事 尙瑞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 充春秋館知兵曹事)

公은 왕조가 망하는 시기에 왕의 최 측근 비서직인 밀직사 좌부대언, 지신사(知申事)를 맡았다. 그는 공양왕에게 군주로서 지켜야 할 아홉 가지 규범을 제시하여[九規] 고려왕조의 중흥책을 제시하였고, 정치적 교훈서인 당태종의 貞觀政要(정관정요)를 강독하기도 하였고, 군주의 모범행동에 대한 글을 모아 제범(帝範)을 편찬하여 바치기도 하였다. 공양왕은 公을 끔찍이 믿고 의지하였다 한다.[국역쌍매당집p569] 공양왕(恭讓王)이 본래 이첨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이첨을 대언(代言)에 임명하고 매우 신임하였다.

▪1391년(공양왕 3년 辛未 47세) 겨울 12월에는 정순대부밀직사지신사경연참찬관겸판전의사사 우문관직제학지제교충춘추관편수관사가 된다. (冬十二月 拜正順大夫密直司知申事經筵叅贊官 兼判典儀寺事 右文館 예전에, 임금이 학사들과 경서를 강론하는 곳을 이르던 말 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事)

▪1392년(태조 원년 壬申 48세) 감시를 맡아 이맹준 등 99인을 뽑았다. 전을 올려 사직을 청허였으나 허락하지 않다.(掌監試 取李孟晙等九十九人 上箋請辭 不允批答) 4월에 언사로 인하여 결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종편되었다.(夏以言事貶結成 冬從便)

⁎결성읍지 명환편에 쌍매당이 결성현의 초대 감무(監務)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本朝李詹麗末擢第爲本縣監務入 我朝集賢直學士知議政府事謚文安號雙梅堂] 그 당시의 동헌자리는 성곡리 분우티(신금성지 옆)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실록1년 원년기사(1292년 7월28 丁未)와 고려사절요449쪽에서 “지신사 李詹을 결성으로 귀양보내고”등에서 당시의 좌가 경미한 자는 유배처(귀향지)를 출생한 고향 내지 관향지(본관지)등 연고지로 정하였으며 이는 어느 정도 편의를 봐준 것이다. 결성현은 쌍매당의 출생지 내지 선대인들의 생활 근거지로 봐야 한다.

公은 정몽주의 黨與(당여)같은 무리에 딸린 사람들[黨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로 지목되어 4월 결성으로 유배되었고 그 해 겨울 從便( 종편스스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허용한 것)되어 경상남도 영산에서 2년간 머물다가 태조 3년(1394) 이흥무(李興茂)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합포(合浦:경남 마산의 옛 이름)로 유배되고, 10월에 종편된다. [태조 3년(1394) 3월 7일 기사, 태조 3년(1394) 10월 11일 1번째 기사] 영산현 서쪽 마고리에 거주하며 집에 매화나무 두 그루를 심어 호(號)를 쌍매당(雙梅堂)이라 하였다. 이는 태조 5년(1396) 1월 24일 기사에서 ‘전 지신사(知申事)였던 이첨(李詹)을 경상도에서 오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때까지 경상도 영산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동문선(東文選)> 동문선 제49권>명(銘)>쌍매당 명 병서(雙梅堂銘幷序)]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慶尙道) 영산현(靈山縣) 참고:【우거】본조 이첨(李詹) 집이 현의 서쪽 마고리(馬古里)에 있다. 매화나무 한 쌍을 뜰 앞에 손수 심고 스스로 그 집을 이름 지었는데, 그 매화가 지금까지 있다.] 유배 중에 매화 두 그루를 심었는지, 유배가 풀리고도 영산현에 머물렀는가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필자註]

▪1398년(태조 7년 戊寅 54세) 가을 7월에 종2품(하) 가선대부이조전서집현전직학사지제교와 성균대사성경연시강관이 되었다. (秋七月 拜嘉善大夫吏曹典書集賢殿直學士知製敎又兼成均大司成經筵侍講官 이첨은 조선 태조 5년(1396) 정월에 유배에서 풀려나 태조 7년(1398) 7월에 이조 전서(吏曹典書), 집현전직학사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동지공거(同知貢擧)에 올랐다. 10월에는 종2품(상) 가정대부중추원학사도평의사사보문각학사 지예문춘추관경연사겸성균대사성이 되었다. (冬十月 拜嘉靖大夫中樞院學士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 知藝文春秋館經筵事兼成均大司成)

▪1400년(태조 9년 庚辰 56세) 4월 가정대부예문춘추관학사 동지경연사겸성균대사성이 된다. (夏四月 拜嘉靖大夫藝文春秋館學士 同知經筵事兼成均大司成) 7월에는 가정대부첨서의흥삼군부사 동지의정부사집현전학사동지경연사겸성균대사성이 된다. (秋七月 拜嘉靖大夫簽書義興三軍府事 同知議政府事集賢殿學士同知經筵事兼成均大司成) 11월에는 계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신사 3월에 서울에 돌아왔다. (十一月以啓稟使入朝受明降辛巳春三月還京 왕조실록 정종 6권, 2년(1400 경진 . 명 건문(建文) 2년) 11월 13일(계유) 11번째기사 상왕이 세자에게 전위한 것을 첨서삼군부사 이첨을 명나라에 보내 알리다. 상왕(上王)이 세자에게 전위(傳位)한 까닭으로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 이첨(李詹)을 명나라 서울에 보내어 주문(奏聞)하게 하였다.

▪1401년(태종 원년 辛巳 57세) 7월에 가정대부예문관학사동지경연사가 된다. (秋七月 拜嘉靖大夫藝文館學士同知經筵事)

▪1402년(태종 2년 壬午 58세) 동지공거가 되어 신효 등 33인을 뽑았다. (同知貢擧 取申曉等三十三人 태종 3권, 2년(1402 임오. 명 건문(建文) 4년)3월 16일(기해) 지공거 권근·동지공거 이첨이 정환 등 33명을 뽑다. 7월에는 정2품(하) 자헌대부 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가 된다. (秋七月 拜資憲大夫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 9월에는 자헌대부지의정부사 판예조사 겸판예빈사사 지경연춘추관사가 된다. (九月拜資憲大夫知議政府事 判禮曹事 兼判禮賓寺事 知經筵春秋館事) 11월에는 하등극별사로 호정 하륜과 같이 인장과 고명을 받으러 명에 입조하였다가 계미(1403년) 4월에 서울에 돌아오다. (冬十一月 以賀登極別使同浩亭河崙入朝受印章誥命 癸未夏四月還京 태종 4권, 2년(1402 임오. 명 건문(建文) 4년)10월 15일(을축) 2번째 기사 하륜과 이첨은 하등극사로서, 조박은 하정사로서 경사에 가다. 좌정승 하륜(河崙)·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조박(趙璞)을 보내어 명나라 서울에 가게 하였다. 윤과 첨은 등극(登極)을 하례(賀禮)하기 위함이요, 박은 정삭(正朔)을 하례하기 위함이었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표문(表文)에 절하였다. ▪ 태종 5권, 3년(1403 계미 . 명 영락(永樂) 1년) 3월 17일(갑오) 1번째 기사 하등극사 하륜 등이 중국 사신과 함께 고명·인장을 받들고 온다 하니 환궁하다 환궁(還宮)하였으니, 임금이 하등극사(賀登極使) 하륜(河崙)·부사(副使) 이첨(李詹)과 하정사(賀正使) 조박(趙璞) 등이 중국 사신 여섯 명과 더불어 고명(誥命)·인장(印章)을 싸 가지고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태백산사고본】 2책 5권 11장 A면【영인본】 1책 259면【분류】 ⁎왕실-행행(行幸). ⁎외교-명(明)

▪1402년(태종 2년 壬午 58세) 의정부 찬성에 제수된다.[ 《청선고(淸選考)》[韓國學中央硏究院 장서각(K2-603)] 등에 의거, 추가. 본문 6-17-2 ‘쌍매당의 贊成職에 대한 고찰’에 詳述)

▪1403년(태종 3년 癸未 59세) 임금의 교시로 진산부원군 하륜, 참찬의정부사 권근과 삼국사략을 編修(편수)하다.(奉敎晋山府院君河崙叅贊議政事府權近同修三國史畧) 4월에는 정2품상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가 된다.(夏四月 拜正憲大夫知議政府事判工曹事寶文閣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 6월에는 정헌대부지의정부사판공조사보문각대제학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된다.(六月拜正憲大夫 知議政府事判工曹事 寶文閣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 7월에는 정헌대부지의정부사 판공조사 겸사헌부대사헌보문각대제학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된다. (秋七月 拜正憲大夫知議政府事 判工曹事 兼司憲府大司憲寶文閣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

▪1404년(태종 4년 甲申 60세 )

10월에 원평파주의 옛 이름, 이홍무 사건으로 문제가 되자 功이 있다하여 신하들의 탄핵에 마지못해 집이 있던 파주로 보낸 것이다.(필자註)

으로 유배되고 12월에 종편된다.(冬十月 秋貶原平 十二月從便《조선왕조실록》永樂二年甲申 태종 7권, 4년(1404 갑신. 명 영락(永樂) 2년) 5월 25일(을축) 이사영·이첨·박돈지 등을 귀양 보내다. 《쌍매당협장집》의 연보에는 1404년(태종 4년 甲申 60세) 10월에 원평으로 유배되고, 12월에 종편된다.(冬十月 秋貶原平 十二月從便) 따라서 유배되는 기간은 2개월이 되지 않는다. ⁜원평(파주의 옛 이름)은 공의 집이 있던 곳이다. 지금의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도 파주목(坡州牧)에 보면 임진정(臨津亭)이라는 시에 “자주 임진 나루를 건너느라 屢渡臨津渡 우리 집을 물가로 옮겼노라 吾家近水移”라는 구절이 있다.

《왕조실록》에는 1404 5월 25일 원평으로 유배를 보내며 태종이 말하길 “이첨은 공로가 있으니 자원(自願)에 따라 부처(付處)하라” 하고 《왕조실록》 1404년 8월 15일 기사에는 “이직 조박 이첨 한이 등에게 성균관에서 생도들을 가르치게 하다”란 기사가 나온다. 협장집의 연보나 실록에 유배시기에 대한 차이는 있으나 유배기간에는 별 차이가 없다. 유배 간 사람에게 성균관의 생도들을 가르치라고 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다. 《왕조실록》에서의 유배기간도 유배가 풀린 후 다음날부터 생도들을 가르쳤다 해도 유배기간은 채 3개월이 되지 않는다.

2월에 정헌대부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된다. (二月 拜正憲大夫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 3월에 정헌대부지의정부사판공조사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성균관사가 된다. (春三月拜正憲大夫知議政府事判工曹事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

▪1405년 (태종 5년 乙酉 61세) 3월 졸하다. 시호는 문안이다.

(春三月乙丑卒 贈諡文安태종 9권, 5년(1405 을유. 명 영락(永樂) 3년) 3월 30일(을축) 2번째 기사 지의정부사 이첨의 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