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빌트
| 칼 빌트 Carl Bildt | |
|---|---|
| 스웨덴의 총리 | |
| 임기 | 1991년 10월 4일 ~ 1994년 10월 7일 |
| 전임 | 잉바르 칼손 |
| 후임 | 잉바르 칼손 |
| 군주 | 칼 16세 구스타프 |
| 스웨덴의 외무장관 | |
| 임기 | 2006년 10월 6일 ~ 2014년 10월 3일 |
| 전임 | 얀 엘리아손 |
| 후임 | 마르고트 발스트룀 |
| 총리 |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949년 7월 15일(77세) |
| 출생지 | 스웨덴 할름스타드 |
| 학력 | 스톡홀름 대학교 |
| 정당 | 온건당 |
| 배우자 | 케르스틴 제테르베리 (1974년-1975년;이혼) 미아 보만 (1984년-1997년;이혼) 안나마리아 코라차 (1998년-) |
| 자녀 | 3 |
| 서명 | |
닐스 다니엘 칼 빌트(스웨덴어: Nils Daniel Carl Bildt, 1949년 7월 15일 ~ )는 스웨덴의 정치인, 외교관이다. 그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총리를 지내고 또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온건당을 이끌었다. 이후에 외무장관이 되어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지냈다.
1979년 빌트는 처음에 스웨덴 국회에 가입하여 2001년까지 거기에 있었다. 그는 빌트가의 일원이자 그의 고조할아버지 길리스 빌트도 또한 스웨덴의 총리였다. 빌트는 또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일어난 동안 중재자로서 자신의 업무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전 유고슬라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평화 구축 노력과 함께 도움을 주었다.
어린 시절과 교육
[편집]1949년 7월 15일 할름스타드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 빌트가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혈통을 가진 가문으로 스웨덴에서 긴 역사를 가졌다. 그의 고조할아버지 길리스 빌트도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1888년부터 1889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칼의 부친 다니엘 빌트는 육군 예비군에서 소령이었다. 칼은 1952년에 태어난 동생 닐스가 있었다. 칼 빌트는 3번이나 결혼을 하고 3명이 자녀를 두었으며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초기 정치 경력
[편집]1968년 빌트는 "보수·자유주의 성향의 대학생 - 반대 '68"로 불린 학생 단체를 시작하는 도움을 주었다. 이 단체는 스톡홀름에서 학생 선거들을 이겼다. 1970년대 초반에 그는 중도우파 학생들을 위한 학생 조직을 지도하였으며 또한 유럽민주학생연합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1976년 비사회주의 정부가 형성되었을 때 빌트는 경제부에서 일했다. 1979년 의원이 되었고 1980년대 초반에 외교에 자신의 강한 토론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6년 온건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1년 선거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이 빌트의 온건당에 의하여 이끌어진 4당 (온건당, 중앙당, 자유당, 기독교민주당) 단체에게 패했다.
총리 재임
[편집]1991년 10월 4일 빌트는 61년 만에 스웨덴에서 첫 보수주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4개의 다른 정당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지도하였다. 그의 정부는 불황기 동안 스웨덴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국영기업 매각과 기업들을 위하여 규칙들을 더욱 단순하게 만드는 것에 전념하였다.
빌트는 스웨덴이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강하게 믿었다. 이전 정부는 이미 유럽 연합 회원직을 신청했으며 빌트는 가입하는 데 스웨덴을 위하여 협상을 신속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1994년 6월 23일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데 협정서를 맺었다.
11월에 투표는 유럽 연합 가입을 지지했으며 스웨덴은 1995년 1월 1일 정식적인 회원국이 되었다. 이것은 빌트 정부의 큰 목표였다.
1994년 9월에 열린 선거에서 그의 정부는 그 다수를 잃었지만 그의 온건당은 몇몇의 더 많은 투표들을 얻었다.
정부의 경제 계획은 경제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교육 바우처 학교들을 소개하고 휴대폰과 에너지 시장을 더욱 개방했으며 또한 어떤 공개 기업과 보건 서비스들을 팔기도 했다. 이 변화들은 스웨덴의 경제를 더욱 개방적으로 만드는 도움을 주었다.
이 개혁들은 당시 많이 토론되었으며 정부는 또한 1991년관 1992년 상승하는 실업과 공공 부채를 향하기도 했다. 1992녀 11월 스웨덴은 자신들의 통화 크로나가 자유롭게 변동하도록 했다. 1994년 즈음에 경제는 잘 자라나고 부채도 내려가고 있었다.
총리가 되기 전에 빌트는 소련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발트 3국을 지지하였다. 총리로서 그는 이 새로운 국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데 열심히 일하여 전직 소련군들의 철수 같이 문제들과 함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정부는 또한 많은 난민들, 주로 보스니아에서 전쟁으로부터 건너온 자들을 관리해야 했으며 빌트는 이민자들에게 환영하는 접근 방식을 지지하였다.
빌트는 인터넷의 초기 지지자였다. 1994년 그는 스웨덴에서 첫 정보기술 위원회를 선도했으며 또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양국 정부 사이에 첫 이메일 교환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베트남에 무역 금수 조치를 끝내는 것에 관한 이메일을 보냈다.
정부는 어쩌다 불동의들이 있었으며 하나의 큰 토론은 외레순 다리를 건설하는 것에 관해서였다. 이것은 하나의 당수가 정부를 떠나는 것으로 선도하였다. 빌트는 1999년까지 지속적으로 온건당을 지도하였다.
발칸 반도에서 업무
[편집]총리 후에 빌트는 발칸 반도 분쟁에서 중재자로 일했다. 그는 1995년 6월부터 전 유고슬라비아로 유럽 연합의 특별 교섭인이었다. 그는 또한 1995년 11월 데이턴 협정을 이끄는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95년 12월부터 1997년 6월까지 그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고위대표였다. 이것은 보스니아 전쟁이 시작된 바로 직후였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그는 발칸 반도를 위하여 유엔 사무총장의 특별 교섭인이었다.
2008년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그해 3월 스웨덴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빌트는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한 후 그곳을 방문하는 데 첫 외무장관이었다.
외무장관
[편집]
2006년 10월 6일 빌트는 외무장관이 되었으며 프레드리크 레인펠트에 의하여 선도된 새로운 정부의 일부였다. 빌트가 이미 총리로 지내오면서 많은 국민들이 이것에 의하여 놀랐다. 그는 2010년 선거 후에 이 직업을 유지하였다.
외무장관으로서 자신의 세월 동안 빌트는 2008년 유럽 연합의 동방 파트너십을 창조하는 도움을 주었다. 2009년 스웨덴이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국을 이끌었을 때 그는 중요한 유럽 연합 회의들의 의장을 맡았다. 그는 가끔 유럽 연합의 최고 외교 업무를 위하여 후보로 숙고되었다.
빌트는 리비아에서 2011년 군사 중재를 지지했으며 그해 3월 정부는 리비아로 사브 JAS 39 그리펜 전투기들을 보냈다. 그들의 업무는 비행 금지 구역 설정을 돕는 것이었다.
2014년 유럽 선거 후에 빌트는 다시 유럽 연합의 최고 외교 역할을 위하여 가능한 후보로 보여졌다. 하지만 다른이가 직위를 얻었다.
2014년 총선 후에 빌트는 외무장관 직을 떠났다. 그러고나서 국제위기감시기구의 이사회에 가입하였다.
튀르키예에 관한 의견들
[편집]2007년 외무장관으로서 빌트는 활동적으로 튀르키예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그는 이스탄불을 "유럽 역사의 진실적인 중심지"로 불렀으며 또한 케말 아타튀르크를 매우 중요한 유럽의 혁명가로 불렀다. 튀르키예의 유럽 연합 회원직을 위한 빌트의 지지는 중유럽에서 토론되었다.
튀르키예의 유럽 연합 회원직은 그 정부가 회원국 키프로스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전들을 향했다. 또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우려 사항이 있었다.
남오세티아 분쟁에 관한 의견들
[편집]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후에 빌트는 러시아의 그 활동들을 위한 이유들에 관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작성하였다. 그는 근처의 국가들에서 그 시민들을 위하여 러시아의 걱정 거리가 지난 이벤트들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빌트는 남오세티아의 독립을 "농담"으로 불렀다.
인터넷 활동들
[편집]빌트는 의사 소통을 위하여 인터넷을 이용하는 데 첫 정치인들 중의 하나였다. 1994년 그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며 이것은 양국 정부 사이에 처음으로 알려진 이메일이었다. 그는 또한 2005년까지 운영된 주간 이메일 시사 해설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는 활동적은 블로거로 2005년 자신의 첫 블로그를 시작하였다. 2007년에 시작된 그의 최근에 블로그는 스웨덴에서 매우 인기가 있다.
2007년 빌트는 가상 세계인 세컨드 라이프에서 "스웨덴 대사관"을 열었다. 이 가상 대사관은 현실적 주미 스웨덴 대사관의 사본이었다. 외무장관으로서 자신으 세월 동안 그의 장관직은 또한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생각들을 나누는 데 트위터를 이용한다. 2013년 즈음에 설문 조사는 그를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중과 가장 활발하게 소통하는 세계 지도자들 중의 하나로서 보여주었다.
정치 이후의 생활
[편집]2014년부터 2016년까지 빌트는 인터넷 거버넌스 글로벌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인터넷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에 일했다. 2015년 그는 우크라이나의 국제 개혁 자문 위원회로 임명되었다. 이 단체는 안전과 경제에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을 조언한다.
빌트는 또한 투자 그룹 레터원을 위하여 이사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2016년 그는 국제적 로펌 커빙턴 앤 벌링에서 시니어 정책 자문관이 되었으며 또한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로 불린 국제 기구를 위하여 월간 기사들을 쓰기도 했다.
2022년 스웨덴 총선 후에 새 총리 울프 크리스테르손은 빌트에게 외무장관 역할을 제공했으나 빌트는 거절하여 똑같은 업무를 두번이나 하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부 링크
[편집]- Alla Dessa Dagar, Bildt's Swedish-language blog
- twitter.com/carlbildt, Bildt's English-language micro blog
- bildt.net, official website (inactive)
- Bildt Comments – Bildt's English-language blog (inactive)
- Bildt and the Ministry for Foreign Affairs의 채널 - 유튜브.
- Sweden navigates complex waters of EU foreign policy, The Local
- "Assuring Peace and a European Future in Bosnia and Hercegovina, Open Letter to Carl Bildt in the light of the "Dayton-2"-negotiations at Butmir, Bosnia and Hercegovina, by Lord Paddy Ashdown, Wolfgang Petritsch und Christian Schwarz-Schilling, 18. Oktober 2009
| 전임 얀 엘리아손 |
스웨덴의 외무장관 2006년 10월 6일 ~ 2014년 10월 3일 |
후임 마르고트 발스트룀 |
| 전임 잉바르 칼손 |
스웨덴 총리 1991년 10월 4일 ~ 1994년 10월 7일 |
후임 잉바르 칼손 |
| 전임 울프 아델손 |
제13대 온건당 대표 1986년 8월 23일 ~ 1999년 9월 4일 |
후임 보 룬드그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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