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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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크의 역사는 16세기 무렵 남부 러시아의 돈강 유역과 우크라이나 동남부 드니프로강 유역에서 출현한 전사 집단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카자크 반란통합교회에 대한 반대 운동을 기점으로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확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유목 생활과 농경 문명의 경계이자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의 경계에 자리한 오크라이나를 방랑하며 약탈로 삶을 영위했다.[1] 돈 강 유역의 카자크 집단이 일찍부터 러시아 제정에 복속되어 카자크 신분을 형성하였다.[2] 반면 자포로지예 카자크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에 대한 투쟁을 통해 17세기 중반 독립적인 카자크 국가를 수립하였다.[3]

우크라이나로부터 이어지는 흑토 지대의 말단에 위치한 쿠반 지방은 역사적으로 유목민의 활동무대였던 것과 더불어 러시아 제정이 수립된 뒤에도 캅카스 무슬림들과 전투가 벌어지던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 농업의 발전은 지체되어 있었다.[4] 제정 러시아는 이 지역에 카자크를 이주시켰고, 이들은 쿠반 카자크로 불렸다. 쿠반 카자크는 약간의 농업과 유르트라는 공유지에서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사적 소유가 없는 집산주의 농업과 카자크 신분상 장기간 해야하는 군복무로 인하여 카자크가 농업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정 러시아는 타 지역 농민들을 이 지역에 거주할 수 있게끔 하였고,[5] 이들은 이노고로드니예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절대 다수가 중앙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온 빈농이었으며, 주로 소작인이나 농업 노동자의 자격으로 쿠반 지역에 정착하여 카자크의 토지를 임대하여 경작하거나, 농장 경영을 도왔다.[6] 제정 러시아는 1867년 캅카스 전쟁이 끝난 이후 이들을 해체시키려 했으나, 혁명의 위협으로 인하여 이들을 존속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7]

각주[편집]

  1. 구자정 2017, 2쪽: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스텝과 농경지대,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 사이 경계에 자리한 오크라이나를 방랑하며 강도짓과 약탈로 점철된 이른바 “카자크짓 (Kazakovat’)하기”로 삶을 영위하던 이들 경계인들은, 우크라이나 역사가 미하 일로 흐루쉡스키(Mykhailo Hrushevsky)의 표현을 빌면, 16세기 후반 일종의 사회현상에서 하나의 사회조직 즉 “보이스코(Voisko)”로 변화하는 중대한 이 행의 경계에 서 있었다."
  2. 구자정 2017, 2쪽: "전자의 카자크 집단이 일찍부터 러시아 제정에 (물론 그 과정에서 격렬한 저항과 반발을 거치며) 포섭되어 카자크 신분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과는 달리,"
  3. 구자정 2017, 3쪽: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17세기 중반 독립적인 카자크 국가를 수립하는 독자 행보를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 구자정 2022, 73쪽: "우크라이나로부터 이어지는 흑토지대의 끝자락에 자리한 쿠반 지방은, 온화한 기후에 쿠반강이라는 풍부한 수자원의 존재로 농업에는 최적의 자연조건을 지녔으나, 이 지역이 고대의 스키타이로부터 근대 초 시기 크 림 타타르에 이르는 유목민의 역사적 활동무대였던 것에 더해, 제정 시기에 와서도 캅카스 지방의 무슬림들과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지던 최전방에 위치한 탓에 이 지역의 농업 잠재력은 제대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5. 구자정 2022, 73쪽: "전통적으로 쿠반 카자크는 ‘유르트(Yurt)’라 불리던 공유지에서 목축을 주 생업으로 생계를 영위하던 집단이었다.15) 이들이 농업을 영위하지 않던 것은 아니었으나, 사적 소유가 부재한 특유의 집산주의적 영농에 더해, 매우 장기간의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카자크의 특수한 지위는 이들이 효율적인 농부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으니, 정부가 쿠반 지역을 非카자크 농민의 이주를 위해 개방한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6. 구자정 2022, 72쪽: "절대 다수가 중앙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온 빈농들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카자크의 토지를 임대하여 경작하는 소작인 또는 농장 경영을 돕는 농업 노동자의 자격으로 쿠반 지역에 정착했다"
  7. 구자정 2022, 72쪽: "남부 러시아에 존재하던 카자크 보이스코의 완전 폐지를 고려하며 이 지역 카자크를 농민으로 전면 전환시키는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12) 제정 정부가 결국 이들을 그대로 존속시킨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바로 점증하는 혁명의 위협 때문이었다"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