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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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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조선 시대 충청도 지역의 수군을 통솔하였던 수군절도사영에 관한 것입니다. 충청수영이 위치하였던 보령시의 유적에 대해서는 보령 충청수영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보령 충청수영성 홍예문. 충청수영성의 서문이었던 망화문(望華門)이다.

충청수영(忠淸水營)은 조선 시대 충청도 해안 지역의 수군진을 통솔하였던 충청수군절도사의 군영이다. 호서주사(湖西舟師)[1]라고도 하였다. 소재지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재 오천항 지역에 해당한다.

충청도는 고려 시대에는 양광도라 불리며, 경상도·전라도 지역의 조세가 경기도 지역으로 운반되는 물길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기에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왜구의 침탈로부터 방어하고 조운선을 보호하는 것이 충청수영의 주요 임무였다.

조선 개창 이후 세종(世宗) 29년(1447년) 수군 병력과 수군진을 정비하고, 충청수영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세조(世祖) 12년(1466년) 충청수군절도사로 승격하였다.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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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수영》(可考水營, 1850년경) 본영사적조에는 태조 5년(1396년) 홍자해(洪自海)가 고만첨사(古巒僉使)로 임명된 것을 기점으로 충청수영의 시작을 서술하였다. 태종 9년(1409년)에는 이구진(李龜鎭)을 충청병사 겸 수군절제사로 임명하여 홍주목 관하에 두었고, 세종 3년(1421년)에는 원윤(元㣧)이 도안무처치사(都按撫處置使)로 임명되었다.

충청수영은 원래 고만 즉 주포면 송학리 송도에 위치하였으나 이후 회이포 즉 오천면 소성리로 옮겨졌는데, 동왕 29년(1447년) 도안무처치사 박배(朴培)가 영사(營舍)와 성채의 건축을 시작하였다는 《가거수영》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즈음에 충청수영이 고만포에서 회이포로 이건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조 13년(1467년)에 수군절도사로 승격하면서 김봉원(金奉元)이 충청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중종(中宗) 4년(1509년)에 이장생(李長生)이 장성(長城) 축성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임진왜란(1592) 당시 정걸선거이가 재임하였다. 정걸이 재임하던 당시 그는 행주대첩 당시 권율에게 화살 등 물자를 지원하여 승리에 기여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에는 충청수사 최호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여 후임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휘하의 장수였던 전 경상우수사 권준이 맡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정은 임시직이었던 통제영(統制營)을 상설화하고 전라좌수사가 겸임하던 통제사를 경상우수사가 겸직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이러한 지휘체계 개편으로 충청수군은 자체방위 외에도 전라, 경상 수군을 지원하는 역할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이후 북방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조선 조정은 황해도에서 강화도 북쪽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방어하고자 교동통어영(統禦營)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통제영과 통어영이라는 '양영(兩營) 체제'하에서 충청수영은 주요 거점의 방위를 지원하는 임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인조 21년(1643년) 인조는 남방에서 변이 있으면 남방에서, 강도(강화도)에서 일이 있으면 강도에서 쓰는 것이 모두 편하다며 북쪽에서의 분쟁 발생시 통어영이, 남쪽에서의 분쟁 발생시 통제영이 충청수군의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1]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 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한국의 천주교에서는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로 기리고 있다.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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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은 보령현에 본영을 두고, 거진 네 곳(평신, 소근, 안흥, 마량)과 진 한 곳(서천포진) 이렇게 다섯 개의 속진과 충청도 연안 13개 수군진관을 소속 수군으로 편성, 총 18개(후기에 19개) 진을 지휘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 휘하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병원(兵員)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종 연간에 충청수군이 보유한 군선은 106척 정도로 충청수영에 서른두 척, 마량과 소근포진에 각각 스물한 척과 열아홉 척, 당진포와 파지포, 서천포에 각각 열여섯 척, 열 척, 여덟 척 등이 분산배치되어 있었다. 수군의 병원은 호수 3,460명에 보인 10,380명으로 총 13,8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가장 많이 배치된 수군진은 충청수영(4,400명), 가장 적게 배치된 진은 서천포진(680명)이었다. 이들 수군이 2개 번으로 나누어 6개월씩 입역하였다.

조선 후기 충청수영의 주사군 총액은 4,816명, 군선 편제는 전선 아홉 척에 구선 두 척, 방선 열여덟 척, 병선 열두 척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가고수영의 충청수군 군선 총액은 전선 열 척, 구선 한 척, 방선 열아홉 척, 병선 열아홉 척이었는데, 읍진에서 전선이 편제된 곳은 서산군, 태안군, 홍주목 3개 읍으로 이들이 군세가 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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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충청도에는 수군도안무처치사 1명, 도만호 2명, 만호 5명 등 총 8명의 수군 지휘관이 주둔하였다. 도안무처치사 휘하에 좌우도 만호가 있어 각각 태안군 서쪽 오근이포와 남포현 구정에 주둔하며, 좌도도만호는 파치도·당진·대진만호를, 우도도만호는 서천과 고만량만호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2]

세조 12년(1466) 진관체제가 확립되면서 수군도안무처치사는 수군절도사로, 수군도만호는 수군첨절제사로 명칭이 변경되고 충청 수군의 지휘체제가 정비되었다. 성종 연간 충청 수군은 충청수영을 중심으로 소근포와 마량 등 두 개 진관으로 구성되어 소근포진첨절제사 휘하에 당진포와 파지포의 만호가, 마량진첨절제사 휘하에 서천포만호가 속해 있었다.

충청수영은 하삼도 수영 가운데 상급 부대가 통어영(統禦營)과 통제영(統制營)으로 중복되어 있는 유일한 진이기도 했다. 지휘 체계상 인조(仁祖) 21년(1643년) 이후부터 북침(만주족의 침공)이 있을 때는 통어영의 지휘를, 남침(일본의 침공)이 있을 때는 통제영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1] 하지만 북방의 위기가 없어지면서 충청수영은 점차 남쪽 삼도수군통제영의 관할에 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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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 오천항에서 대한민국 국도 제40호선국도 제21호선과 교차하는 주포사거리에 이르는 구간의 도로명이 충청수영로로 남아 있다.[3]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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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2 3 《승정원일기》85책, 인조 21년 6월 24일
  2. 황의천 (2007). 조선시대 충청수영과 속진의 위치에 대한 고찰. 보령문화 (16).
  3. 한양에서 보령으로 향하던 충청수영로(忠淸水營路) - 선조들의 발자취, 성과 옛 도로(지역IN문화)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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