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군
촉군(蜀郡)은 옛 중국 군현제상의 군으로, 지금의 청두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관할했다.
진
[편집]원래는 고촉 왕국이 있던 곳으로, 진나라의 혜왕이 사마조 등을 보내 고촉 왕국을 병합하였으며, 주 난왕 원년(기원전 314년)에 공자 통(通)을 촉후로 봉하고 진장(陳壯)을 촉후의 재상[相]으로 삼으면서 파군과 촉군을 처음 세웠다. 첫 군수는 장약(張若)이 임명되었다. 군의 치소는 성도로, 주 난왕 5년(기원전 309년)에 장의와 장약이 고촉의 서울이었던 성도에 성을 쌓았다. 주나라가 망한 후, 진 효문왕이 이빙을 군수로 삼으면서 촉군은 매우 발전했다.[1]
한
[편집]진나라가 망한 후, 항우의 제후왕 분봉에서 촉군은 파군 · 한중군과 함께 한왕 유방의 봉국에 속했다. 한왕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고 전한의 첫 황제가 되면서,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촉군과 파군의 영역을 분할하여 광한군을 설치해 촉군의 영역은 줄어들었다.[1]
무제가 자사를 설치하면서 익주자사부에 속했다.
원광 4년(기원전 131년)에 촉군에 동 · 서 · 남 · 북 4부 도위를 설치했다.[1]
원정 6년(기원전 111년), 한 무제의 서남방 정벌의 결과로 촉군 남부를 광한군 서부와 함께 나누어 월수군을 설치했다. 또 촉군의 서쪽에 있는 공도(邛都)를 침려군으로, 북쪽에 있는 염(冉) · 방(駹)의 영역을 문산군으로 두었는데, 천한 4년(기원전 97년)에 침려군을 폐하고 촉군의 양부도위로 편입시켰다. 선제 지절 3년(기원전 67년)에 문산군을 폐하고 북부도위에 속하게 해 촉군의 영역이 더 넓어졌다.[1]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68,279호, 1,245,929명을 관할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15현(9현 6도)이다.
이름 | 한자 | 대략적 위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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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현 | 成都縣 | 청두시 | 군의 치소가 있었다. 76,256호가 있었다. 공관(工官)이 있었다. |
비현 | 郫縣 | 청두시 피현 | 서쪽에 강타(江沱)가 있어 동으로 대강(大江)에 들어간다. |
번현 | 繁縣 | 청두시 펑저우시 | |
광도현 | 廣都縣 | 청두시 솽류구 남동 | |
임공현 | 臨邛縣 | 청두시 충라이시 | 복천수{僕千水, 지금의 난허(중국어: 南河)}가 무양(武陽)에 이르러 강수로 들어가니, 두 군(촉군·건위군)을 지나 (오)백 십리를 간다. 철관과 염관이 있다. |
청의도 | 靑衣道 | 야안시 밍산구 북 | 《우공》의 몽산계(蒙山溪)다. 대도수{大渡水, 지금의 칭이 강(중국어: 青衣江)}가 남동으로 남안(南安)에 이르러 재수(渽水)로 들어간다. |
강원현 | 江原縣 | 청두시 충저우시 동 | 수수(𨞪水)가 강수에서 갈려나와 남으로 무양에 이르러 강수로 들어간다. |
엄도 | 嚴道 | 야안시 잉징현 | 공래산(邛來山)이 있어 공수{邛水, 지금의 잉징 하(중국어: 荥经河)}가 나와 동으로 청의강에 들어간다. 목관(木官)이 있다. |
면사도 | 緜虒道 | 아바티베트족창족자치주 원촨현 남서 | 옥루산(玉壘山)이 있어 전수(湔水)가 나와 남동으로 강양(江陽)에 이르러 강수로 들어가니, 세 군(촉군·건위군·광한군)을 지나 1890리를 간다. |
모우도 | 旄牛道 | 야안시 한위안현 남쪽 일대? | 선수(鮮水)가 요외에서 나와 남으로 약수(若水)로 들어간다.
약수도 요외에서 나와 남으로 대작(大莋, 월수군의 속현)에 이르러 승수(繩水)로 들어가니, 두 군(촉군·건위군)을 지나 1600리를 간다. |
사현 | 徙縣 | 야안시 톈취안현 동 | |
전저도 | 湔氐道 | 아바티베트족창족자치주 쑹판현 북 | |
문강도 | 汶江道 | 아바티베트족창족자치주 마오현 북 | |
광유현 | 廣柔縣 | 아바티베트족창족자치주 원촨현 북 | |
잠릉현 | 蠶陵縣 | 아바티베트족창족자치주 마오현 북 |
신
[편집]왕망은 촉군의 이름을 고쳐 도강(導江)이라 했으며,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전한 | 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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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도(廣都) | 취도정(就都亭) |
임공(臨邛) | 감공(監邛) |
강원(江原) | 공원(邛原) |
엄도(嚴道) | 엄치(嚴治) |
잠릉(蠶陵) | 보창(步昌) |
후한
[편집]11성, 300452호, 1350476명을 관할했다.
이름 | 종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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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成都) | 현 | 군의 치소가 있었다. |
강원(江原) | 현 | |
비(郫) | 현 | |
번(繁) | 현 | |
광도(廣都) | 현 | |
임공(臨邛) | 현 | |
전저(湔氐) | 도 | |
문강(汶江) | 도 | |
팔릉(八陵) | 현 | |
광유(廣柔) | 현 | |
면사(緜虒) | 도 |
또 연광 원년(기원전 122년)에 서부도위가 관할하던 지역을 촉군속국으로 따로 떼었다. 속국도위는 111568호, 475629명을 관할했다.
이름 | 종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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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漢嘉) | 현 | 청의현을 개명. |
엄(嚴) | 도 | |
사(徙) | 현 | |
모우(旄牛) | 현 |
영제 시기에 북부도위가 관할하던 문강 · 잠릉 · 광유 세 현을 떼어 문산군을 세웠다.[4][1] 또 《화양국지》에서는 영제 시기에 촉군속국을 한가군으로 독립시켰다고 한다.[1] 그러나 한가군은 대략 중평 5년(188년) 즈음에 다시 촉군에 병합되었다.
삼국
[편집]촉한 소열제의 장무 원년(221년), 촉군속국은 다시 한가군으로 독립했다. 촉군의 영역은 더 줄어들었다. 펑저우 시 동쪽에 있던 번현은 247년(연희 10년)에 펑저우 시 서남쪽으로 치소가 옮겨졌다.
서진
[편집]6현, 5만 호를 관할했다.
이름 | 종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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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成都) | 현 | 군의 치소가 있었다. |
광도(廣都) | 현 | |
번(繁) | 현 | |
강원(江原) | 현 | |
임공(臨邛) | 현 | |
비(郫) | 현 |
동진 · 성한
[편집]이웅이 촉군의 일부를 나누어 한원군(漢原郡)을 설치해, 촉군의 영역은 더 줄어들었다.[5]
동진 목제는 건위군의 속현인 우비(牛鞞)현을 촉군으로 옮겼다.[5]
송
[편집]효건 2년(455년), 교호(僑戶)[6]들로 영창령(永昌令)을 두었다. 따라서 송대의 촉군은 다음 5현, 11902호, 60876명을 관할했다.
이름 | 종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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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成都) | 현 | 군의 치소가 있었다. |
비(郫) | 현 | |
번현(繁縣) | 현 | |
비현(鞞縣) | 현 | |
영창(永昌) |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