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 만세운동
조천 만세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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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의 일부 | |||
날짜 | 1919년 3월 21일 - 3월 24일 | ||
지역 |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제주군 조천면 | ||
원인 | 3.1 운동 | ||
목적 | 3.1 운동의 지방 개최 | ||
결과 | 일제의 무력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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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당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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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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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인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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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 |||
체포자수 | 23 명 |
조천 만세운동은 3·1 운동의 일환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에서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있었던 독립 만세운동이다.[1]
배경[편집]
3·1 운동 당시 서울의 많은 학생들이 동참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만세 시위 차단을 위해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귀향 조치하였다.[2] 이에 제주 출신의 유학생들도 귀향하게 되었다. 휘문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김장환은 고향인 조천으로 돌아와 김시범 등 14명을 모으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3]
계획[편집]
김장환의 일가는 아버지 김시학을 비롯하여 당숙 김시범 등이 이미 항일 운동의 경력이 있었다. 김장환은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기미독립선언서를 품에 품고 귀향하였다.[4] 김장환은 당숙 김시범과 김시은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만세운동을 진행하려는 뜻을 알렸다. 김시범은 의병 활동을 하였던 최익현의 제자 김희정의 문하생이었다. 이들 세 명은 김용찬, 고재륜, 김형배, 황진식, 김경희,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박두규, 김년배 그리고 백응선을 규합하여 만세를 준비하였고[5] 거사일은 조천의 명망 높은 유림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6] 만세를 준비한 사람들은 태극기 그려 행사를 준비하였다.
만세운동[편집]
조천의 만세운동은 3월 21일에서 3월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만세동산[편집]
1차 시위는 유림 김시우의 기일에 맞추어 일어났다. 시위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7] 14명의 주동자와 기일에 맞추어 제사에 참여하였던 150여 명의 유림이 태극기를 흔들었고 김필원은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써 들었다. 대열이 미밋 동산으로 행진하자 인근 조천리, 신촌리, 함덕리의 5 - 6백 명이 합세하였다.[8] 이 동산은 이후 만세동산으로 불리게 되었다.[3] 이들은 시내까지 행진하려 하였으나 조천읍 신촌리에서 경찰과 충돌하였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7]
후속 시위[편집]
다음 날인 3월 22일 백응선 박두규는 체포된 연행자의 석방을 주장하며 만세를 주도하였고 주민 2백여명이 합세하였다. 경찰은 백응선과 체포하고 시위를 해산시켰다.[8] 사람들은 해산을 당한 뒤에도 23일과 24일 계속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인원은 더욱 늘었다. 3월 24일은 조천읍의 장날이었고 시위자는 1천 5백여명에 달했다.[6] 그러나 김연배 등 시위를 주도하던 4인이 체포되면서 만세운동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1]
체포와 재판[편집]
만세 운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시위를 계획한 14인을 포함하여 23인이 재판을 받았다. 1919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이 1심을 선고하였고 항소하자 5월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가 다음과 같이 확정 선고하였다.[4][9]
성명 | 나이 | 직업 | 형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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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형 | |||
김시범 | 30세 | 잡화상 | 징역 1년 |
김용걸 | 31세 | 잡화상 | 징역 6월 |
김형배 | 19세 | 농업 | 징역 6월 |
김장환 | 18세 | 학생 | 징역 1년 |
김필원 | 20세 | 농업 | 징역 8월 |
백응선 | 24세 | 과자상 | 징역 6월 |
박두규 | 23세 | 교사 | 징역 8월 |
김시은 | 30세 | 잡화상 | 징역 1년 |
고재륜 | 21세 | 농업 | 징역 6월 |
황진식 | 20세 | 잡화상 | 징역 1년 |
김경희 | 26세 | 농업 | 징역 6월 |
김희수 | 21세 | 농업 | 징역 8월 |
이문천 | 28세 | 잡화상 | 징역 8월 |
김년배 | 24세 | 농업 | 징역 1년 |
집행유예 3년(징역 6월) | |||
김동인, 한석화, 김시희, 김종호, 김형탁, 부병각, 한석영, 김백능, 한백흥 |
이후[편집]
조천 만세운동 뒤 서귀포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다.[6]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산 사람들은 미밋동산 동지회라는 의미에서 동미회(同味會)를 구성하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10]
만세운동의 불씨를 당긴 김장환은 이후 제주에서 생활하다 부인과 사별 후 서울로 올라가 동아일보 기자를 하였다. 서울에서 평양 출신 여성과 재혼하고 평양으로 이사하였다가 해방을 맞았고[11], 남북이 분단되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하여 월북자로 기록되었다.[5] 김시범은 1920년 만기 출소이후에도 동미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야학 활동과 조천소비조합 운동을 하다 해방을 맞았으나 제주 4·3 사건에 휘말려 희생되었다.[11]
조천 지역은 이후로도 항일 정서가 강하였으며 사회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해방뒤 제주인민위원회와 남로당제주도당 위원장을 역임한 안세훈도 조천 사람이었다.[6] 이런 이유로 조천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5]
서훈[편집]
1983년 김시은이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다시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990년 고재륜 등 8명이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백응선은 건국포장, 박두규는 애족장 등을 받았다. 그러나 김장환은 월북을 이유로, 김시범은 4·3 희생자라는 이유로 김용환은 행적이 불문명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인정에서 제외되었다.[11]
기념물[편집]
해방이후 미밋동산에 삼일정을 짓고 3·1운동독립기념비를 세웠다.[12] 이후 미밋동산은 만세동산으로 불리며 삼일절 기념행사를 가졌다.[13] 1988년 조천만세동산성역화사업추진회가 결성되었고 1990년 조천 출신의 재일동포 김봉각씨가 5억원을 기부하여 기념탑을 조성하였다.[14] 1997년 8월 15일 제주항일기념관이 개장하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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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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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 추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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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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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참가자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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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공적비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가 나 조천만세운동, 제주 항일 기념관
- ↑ 3.1 운동, 문화콘텐츠닷컴
- ↑ 가 나 만세동산, 제주특별자치도
- ↑ 가 나 조천리 만세동산, 고영철의 역사교실
- ↑ 가 나 다 조천만세운동 14인의 동지들, 여전한 ‘좌익의 굴레, 미디어제주, 2015년 8월 14일
- ↑ 가 나 다 라 제발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했다니까, 오마이뉴스, 2007년 8월 27일
- ↑ 가 나 3·1운동 유적지를 가다 - ⑬제주 조천·법정사·세화장[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연합뉴스, 2019년 2월 24일
- ↑ 가 나 조천만세동산에서 제주 항일운동의 얼을 찾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국가보훈처 블로그 훈터, 2012년 3월 13일
- ↑ 제주서 항일 운동에 불을 지폈다, 제주신보, 2019년 1월 31일
- ↑ 100년전 그 날, 조천 미밋동산서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제주의소리, 2019년 3월 11일
- ↑ 가 나 다 외면받는 제주 조천만세운동 독립투사, 2017년 2월 28일
- ↑ 3.1운동기념탑, 제주항일기념관
- ↑ 조천만세동산에 울려퍼진 "대한독립 만세", 제주신문, 2019년 3월 3일
- ↑ 조천만세동산 완공 눈앞, 서귀포신문, 2003년 3월 7알
- ↑ 제주항일기념관 연혁, 제주항일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