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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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군사들이 열렬한 환영 속에 코펜하겐에 입성하고 있다.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독일어: Schleswig-Holsteinischer Krieg)은 덴마크 왕국슐레스비히 공국-홀슈타인 공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자 내전이다. 덴마크에서는 이 전쟁을 3년 전쟁(덴마크어: Treårskrigen)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으로 인해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지방과 홀슈타인 지방을 지배하게 되고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원인이 된다.

배경[편집]

덴마크는 지금의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슐레스비히 공국홀슈타인 공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이 두 지방은 나폴레옹 전쟁 때 자국이 승전 대가로 가져간 곳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두 나라는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던 1848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8세 국왕이 죽자, 그의 아들 프레데리크 7세가 즉위하였다. 이 두 지방에 관심이 많았던 프레데리크 7세는 1848년 5월 21일에 덴마크 왕실에서 프로이센과 전쟁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찬성했다. 결국 3월 24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인들이 렌츠부르크 요새를 습격하여 에서 임시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7세 국왕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 연합 해체를 선언했고 이를 두려워하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프로이센 편에 가담했다. 독일 연방의회는 프로이센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독일의 요청을 받은 프로이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슐레스비히를 향해 진군했다.

전쟁 경과[편집]

독일의 요청을 받은 프로이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슐레스비히를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역사는 프로이센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프로이센과 이웃한 강대국들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은 슐레스비히 점령이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한편 덴마크는 슐레스비히를 홀슈타인으로부터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덴마크와 이웃한 스칸디나비아 나라인 스웨덴, 노르웨이가 덴마크를 지지했으며 영국, 러시아, 프랑스 또한 덴마크를 지지했다.

1849년 2월 23일, 덴마크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스비히 문제가 덴마크의 요구에 따라 처리되지 않는다면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투는 4월까지 계속되었다. 프로이센 군대는 슐레스비히를 지나 유틀란트까지 진군했고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브 전투, 슐레스비히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승전을 거두자, 다시 전쟁은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로톨프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로이센 영토로 진입하게 된다.

전쟁의 확전을 두려워한 강대국들은 다급하게 1850년 중재안을 냈다. 프로이센은 이 제안에 서명하였다. 덴마크는 찬성과 반대로 갈라져 논란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1851년 런던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이 전투는 덴마크의 승리로 끝났다. 덴마크 군사들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코펜하겐에 돌아왔다.

평화 협정[편집]

평화 협상은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분쟁으로 인해 세 번의 전쟁과 휴전이 반복되었고, 전쟁 전체를 통틀어 덴마크가 승리의 기쁨을 누린 것은 이스테드 전투 뿐이었다. 이스테드 전투는 아주 미미한 전투였지만 그 전투에서의 승리는 덴마크인들에게 일시적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덴마크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평화 협정은 1852년 5월 8일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덴마크, 스웨덴, 영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참여한 가운데 런던에서 체결되었다. 강대국들은 전전(戰前) 상태로의 복귀를 택했고,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영유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협정의 이면에는 슐레스비히가 덴마크에 병합되는 것이 유럽의 세력 균형 및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강대국들의 기대가 깔려 있었다.

협정 체결 후, 슐레스비히의 통치 조직은 친덴마크 왕당과 관료들을 중심으로 재건되었다. 이로 인해 30여명의 혁명 지도자들(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자들)이 추방당했다. 덴마크 정부는 슐레스비히의 언어를 북부는 덴마크어로, 남부는 독일어로 하되 두 언어가 혼용되는 지역은 덴마크어를 공식 언어로 한다는 포고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정책에 대해 반대했다. 그들은 덴마크의 언어 정책이 결국 슐레스비히를 덴마크 쪽으로 기울게 한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독일 급진파들은 1848년 혁명의 여파로 덴마크가 입헌적 개혁을 이룬데 반해,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이 방해받음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전쟁의 여파[편집]

이 전쟁을 계기로 승전국인 스웨덴, 노르웨이는 프로이센의 온갖 이권을 빼앗아 갔다. 프로이센에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수상에 취임하고 군대를 엄격하게 길렀다. 이러면서 프로이센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지만 덴마크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을 상대하기에 너무 약해졌다. 결국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덴마크를 간단히 격파하고 슐레스비히를 차지했다. 이 전쟁으로 덴마크는 약소 국가로 추락했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연합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당시 스웨덴 등이 빼앗아 갔던 이권들을 프로이센에 돌려줬다. 또한 허약해진 스웨덴, 노르웨이에 간섭하고 이권을 차지하여 스칸디나비아에 세력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