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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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鄭曜, 1331년 ~ 1414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시호는 호희(胡僖)이다.[1]
생애
[편집]출사하게 된 경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내시(內侍) 출신이었다고 한다.[1]
1388년(창왕 즉위년) 왜적의 침구가 극성을 떨치자 자혜부윤(慈惠府尹) 조언(曹彦),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 최칠석(崔七夕)·장사길(張思吉)과 함께 방어에 나섰으며[2], 1390년(공양왕 2)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했을 당시 공이 있었다 하여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되었다.[3]
조선 건국 후인 1392년(태조 원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이듬해에는 다시 회군2등공신에 책록되었다.[4]
1402년(태종 2) 손자 정발(鄭發)이 겨우 14세에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 벼슬을 받은 일로 탄핵되기도 했으나, 1407년(태종 7)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되었다가, 후에 잉령치사(仍令致仕)[5]했다.
1414년(태종 14) 84세로 졸하자, 태종(太宗)이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로 쌀‧콩 30석과 종이 1백 권을 하사하였으며, 중관(中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