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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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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조선 시대에 전라우도 방면의 수군 지휘소로써 세워진 지방군 지휘부인 전라우수영에 관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해남 지역에 설치된 조선 시대 전라우수영의 유적에 대해서는 해남 전라우수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은 조선 시대 전라도 서부 지역의 수군(水軍)을 지휘하였던 군영(軍營)이다. 지휘관은 정3품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약칭 전라우수사).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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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초 이래 해안 지역뿐 아니라 내륙 지역까지 침탈해 오던 왜구에 대한 방어책으로 조선은 지방의 주요 요해처마다 수군절도사가 파견되는 주진(主鎭)을 설치하고, 주진을 중심으로 그 주진 아래에 첨절제사가 파견되는 거진(巨鎭) 및 그 휘하 만호가 파견되어 지휘하는 각지의 여러 진(鎭)을 두는 형태로 주진-거진-제진의 방어 지휘체계를 구축하였다. 수군을 지휘하는 수영은 육군을 지휘하는 병영과 마찬가지로 주진으로서 산하 거진-진을 총지휘하여 왜구 방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옥구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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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수영은 서남해 방면의 왜구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처음 설치된 위치는 옥구현(전라북도 군산시)이었다.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나 《태종실록》 태종(太宗) 8년 12월 24일조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옥구의 수영은 바닷길의 중앙이 아니라 진수에 합당하지 않"음을 지적하는[1] 언급이 있어 옥구 지역에 소재했던 전라수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옥구현은 전북 군산시 시내 및 옥구읍, 옥서면, 옥산면, 회현면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금강과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바다와 만나는 접경에 위치해 있고, 서쪽 해상으로 다수의 섬들이 위치해 있어 뱃길에 바람을 피해 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방어상 시설의 엄폐가 용이했다. 옥구 및 전주, 태인, 금구, 임실, 진안, 장수 등 7개 고을의 조세가 보관되는 이른바 '칠읍봉세조창'과 삼남(三南) 지방의 세곡선이 모이는 오식도가 소재한, 조운선과 장삿배가 오가는 바닷길의 중심지로, 고려 시대부터 임피신창진, 화산봉대 등의 군사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굴포 그리고 목포진으로의 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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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6년(1406년)과 8년(1408년) 서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왜구의 활동이 급증하였는데, 태종 8년(1408년)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왜적 방어를 위해 올린 조목에서 옥구가 바닷길의 한복판이 아니라 진수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바닷길의 한복판에 해당하는 무안현 대굴포(현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로 수영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1]

대굴포는 서남해에서 영산강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위치하고 있는데, 영산강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까지 조수간만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으며 일찍부터 수상 교통로가 발달하였고 내륙과 해안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또한 영산강에 접해 있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입지를 제공하여 방어적인 측면에서 유리하였다.

다만 대굴포의 입지상 문제점으로 인해 이후 다시금 이설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굴포가 소재한 위치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영산강의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조수 때에는 넓은 갯벌이 드러나 작은 배만 겨우 물길로 오갈 수 있어[2] 해안 방어에 어려움이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또한 병선이 집결된 중심 치소는 내륙 깊은 곳에 둔 채로 해안까지 그 경계 범위와 작전 반경을 높이기에는 병선이나 수군의 증강액도 부담이었다.[3] 이후 세종 11년(1429년) 전라감사가 이를 지적하며 대굴포의 병선을 난량(蘭梁)으로 옮길 것을 건의할 때까지도 전라수영은 대굴포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굴포가 위치했던 함평군 대곡마을에는 현지 전승으로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였다는 수통막(水統幕), 동쪽 초소였다는 동막(東幕), 외래객을 맞이했다고 전하는 빈정(賓亭), 마을 사람들이 양창, 창골, 창등이라 부르는 강소창(江所倉), 선소창(船所倉)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4]

세종 11년(1429년) 전라감사의 계에서는 대굴포가 "배를 대는 곳이 깊고 멀 뿐만 아니라 포구도 좁고 굽어서 이 또한 때에 맞게 응변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5] 14년(1432년)에도 전임 제총 이각(李恪)이 대굴포의 수영의 입지가 가진 단점으로 '바다까지 거의 2식경이나 되는' 먼 거리를 지적하였다.[6]

조선 조정은 도순찰사 정흠지에게 전라수영 이설 장소를 새로 조사하도록 하였고[7] 정흠지는 종사관 민공(閔恭)과 함께 세종 14년(1432년) 9월에 나주에 도착하여 21일부터 29일까지 진도, 황원, 토주 등지를 돌아본 뒤 30일에 나주로 귀환, 서울에 돌아와[8] 전라수영을 바닷가에 위치한 목포진으로 옮겨 설치할 것을 진언하였다.[9] 또한 목포의 병선은 황원의 남면 주량으로 옮기고, 진도의 서면 소가포에 수영의 병선 서너 척을 달마다 윤번제로 돌아가면서 정박하며 수영을 수호하게 되었다.[9]

해남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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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수영은 세종 22년(1440) 목포진에서 다시 해남 황원곶으로 옮겨졌고, 이후 최종적으로 해남에 자리잡았다.

우선 해남은 고려 시대부터 영남과 개경으로 이어지는 세곡 운반로로 활용되었던 뱃길인 순천에서 부용창까지의 중간 기점으로 한반도 남해와 서해의 분기점으로 여겨지는[10] 전라도 바닷길의 한복판에 있어 전라도 해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통제하는데 적합하다는 점, 포구에 큰 배의 항행을 가로막을 갯벌이 없고 조수가 발생하지 않아 선박이 정박하기 용이하였으며, 전라우수영이 입지한 지역은 해남에서 두 번째로 넓은 토지가 분포한 곳으로 경지 면적이 인근 완도군의 전체 경지 면적보다 넓고 어염 생산도 풍부하며 주변 임야에서 땔감 채취도 용이하여, 물자를 자체적으로 얻기도 충분하였다.

아울러 조선의 해방 전략은 초기에는 경계와 방어에 치중하여 만의 깊은 곳으로 병선을 배치하고 거점 중심의 수동적인 방어 전략을 취하던 것이 왕조 개창 이래의 꾸준한 노력으로 향상시킨 수군 전략과 세종 초 기해동정 등 왜구 진압에 대한 자신감을 기반으로, 병선의 경계 범위와 작전 반경, 기동성을 높임으로써 병선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공격적인 방어 전략으로 전환하면서 기존의 강어귀 깊은 곳에 있던 수군진과 병영을 바닷가 지역으로 끌어내서 설치하는 방침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세종 21년(1439년)에는 수륙군이 협공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처해야 한다는 추세로[11] 조선의 군사 제도는 개편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군사 체제가 진관체제로 정비되고 수륙군과 연해, 내륙을 한데 묶는 방어 체제로 개편되면서[12] 전라병영이 설치된 강진과 가까워 육군과 합동 작전이 가능한 입지 조건을 가진 해남이 전라수영의 거점으로 선택되었다.

문종 1년(1451년) 5월 진도군의 치소를 이곳으로 옮기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후 실제로 황원목장을 폐지하여 진도로 이설하는 것과 진도 도민의 황원목장지로의 이주가 추진되었다.

세조 11년(1465년) 전라도수군절도사영(全羅道水軍節度使營)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좌·우수영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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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9년(1478년) 3월에 순천 내례포(內禮浦, 오동포)에 왜구가 침입하는 사건을 계기로 이곳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동왕 10년(1479년) 10월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명을 증원하여 내례포진을 주진으로 하는 전라좌수영이 설치, 내례포와 황원곶에 설치된 수영으로 각각 전라좌·우수영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중종 16년(1521년) 전라우수영의 이설 논의가 있었는데, 이듬해 왜구가 추자도를 침입하고, 왜구의 추자도 침입을 계기로 수군진관이 신설되었다. 중종 때의 사량포왜변 및 삼포왜변에 이어 명종 10년 5월에는 왜구 선박 70여 척이 달량포(達梁浦)를 포위한 것을 시작으로(을묘왜변) 어란포(於蘭浦)와 장흥, 영암, 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을 저질러, 이를 진압하러 나선 전라병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긴박하게 전개되자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우수사를 맡고 있던 이억기가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합류하여 남해안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경상, 전라, 충청 삼도 지역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고 이순신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되었는데, 정유재란(1597년) 당시 이순신 대신 교체되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크게 패하고 이억기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칠천량의 패전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조선 조정은 수군을 폐지하고 그 병력을 육군과 합류시켜 일본군과 싸우게 하려 하였으나,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이 진도 벽파진으로 통제영을 옮기고 "아직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상소를 올려 조선 조정의 수군 해체를 막은 뒤, 해남 우수영 앞바다인 울돌목에서 열두 척의 배를 거느리고 일본 수군을 상대로 그 북상을 저지해내는데 성공했다(명량 대첩). 울돌목에는 이때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숙종 14년(1628년) 《명량대첩비》가 세워졌는데, 1942년 3월 일제 총독부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해방 뒤에 다시 경복궁 근정전 뒤에서 찾아내어 세웠다.

이억기의 후임으로 전라우수사로 임명되었던 김억추는 명량 대첩 이후 육군으로 옮겨가고, 거제현령 안위가 통제사 이순신의 추천으로 승진하여 전라우수사로 임명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7월 15일, 기존의 다른 재래식 병영, 수영들과 함께 폐지되었다.[13] 마지막 전라우수사는 동왕 31년(1894년) 의정부(議政府)에서 임명되었던[14] 권봉규(權鳳圭)이다.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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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6년(1397년)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를 폐지하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파견한다는[15] 이른바 파도설진(破道設鎭)이 이루어졌다. 이때 설치되는 15개 진 가운데 전라도 방면에는 목포, 조양(보성군), 옥구, 흥덕 이렇게 4개 진이 있었고, 진마다 첨절제사가 배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라도 수군에 수군처치사가 한 명에 도만호 두 명, 만호가 열세 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전라우수사 밑에 첨절제사가 파견되는 임치도진관이 있고, 그 휘하 진으로 검모포, 법성포, 다경포, 목포, 어란포, 군산포, 남도포, 금갑포가 배속되어 있었다.

이후 중종 17년 왜구의 추자도 침입을 계기로 수군진관이 개편되어, 임치도진관에 더해 가리포진관이 신설되면서 임치도진관 소속의 어란포진, 금갑도진, 전라좌수영 사도진관 소속의 마도진이 가리포진관에 배속되고, 임치도에는 지포진이 신설되었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7관 18포로 구성되어 있어 임란 당시 조선 수군 군영 중 가장 규모가 컸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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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2 《태종실록》권16, 태종 8년 12월 24일
  2. ↑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함평 대굴포 전라수영》 무돌, 2003, 37쪽
  3. ↑ 《세종실록》권86, 세종 14년 10월 20일
  4. ↑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전라도》함평군편, 1983
  5. ↑ 《세종실록》권44, 세종 11년 4월 12일
  6. ↑ 《세종실록》권57, 세종 4년 8월 5일
  7. ↑ 《세종실록》권57, 세종 14년 9월 9일
  8. ↑ 《금성일기》선덕 7년 임자, 세종대왕 14년
  9. 1 2 《세종실록》권58, 세종 14년 10월 20일
  10. ↑ 《증보문헌비고》권32, 여지고20, 관방(關防)8, 해방(海防), 남해의 해안편 및 같은 책 권33 여지고21, 관방9, 해방, 서해의 해안편
  11. ↑ 《세종실록》권85, 세종 21년 6월 16일
  12. ↑ 방상현 《조선초기 수군제도》 민족문화사, 1991, 67쪽
  13. ↑ 칙령 제140호,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의 폐지에 관한 안건[各道兵營水營廢止件]〉 반포.
  14. ↑ 《승정원일기》 3052책 (탈초본 139책) 고종 31년 11월 16일 무자 5/16 기사 1894년 開國 503년 光緖(淸/德宗) 20년
  15. ↑ 《태조실록》권11, 태조 6년 5월 21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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