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영 (18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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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張錫英, 1851년(철종 2)∼1926)은 일제강점기 칠곡 국채보상회 회장, 제2차유림단운동 영남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이다. 경상북도 칠곡 출신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호는 회당(晦堂). 우리나라 성리학의 6대가의 한분으로 관직은 의정부 우참찬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여헌 장현광 선생의 9대손이다.

이력[편집]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며, 또 고향의 만세운동을 펴기 위하여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 유림과 접촉하여 만세일정을 계획하였다.

이 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만세운동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과 만나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 4월 2일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회당집』·『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이 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2]

참고 문헌[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1997)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