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경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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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李源庚, 1916년 ~ 2010년 12월 3일)은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연극인, 극작가이며 무대미술가, 연극 연출가이다. 본관은 진보.

생애[편집]

  • 1916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났다. 교동보통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일고보 졸업 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 도쿄의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했다.[출처 필요] 일본 축지소극장에서 작품 햄릿에 무대미술가로 데뷔.
  • 1938년 일시 입국하여 극예술연극회의 춘향전의 무대장치 담당으로 참여하였다.
  • 1940년 귀국, 극단 고협(대표 유치진)에서 현진건 원작의 무영탑을 상연할 때 무대미술 담당했다.
  • 1941년 현대극장 창립에 참여, 현대극장 창단동인으로 연극활동에 참여, 무대장치 담당으로 활동했다. 흑룡강 극단과 조춘(早春)극단의 현대극장 3회 공연작의 무대장치 담당으로 참여했다.
  • 1943년 희곡 <해적 프리헤이즈>로 문단에 등단했다가, 본의 아니게 일본어로 썼으나 자책감에 시달려 일시적으로 연극계를 떠났다가 복귀했다. 그 뒤 다시 연극계에 복귀했다.
  • 1952년 한국 전쟁 중 신청년 악극단의 격분 의 연출을 담당하고,
  • 1953년 피난지 대구에서 제작자 박남을 만나 악극 제2의 생명 등 몇 편을 연출하면서 다시 활동을 꾸준히 했다. 극협의 기획담당으로 활동하다, 국립극장 대표 서항석을 만나 국립극단으로 건너갔다.
  • 1954년 극단 민극(국립극단의 전신)의 창립에 참여, 창립멤버로 활동했고 창단기념공연인 파랑새를 명동 시공관에서 연출했다.
  • 1955년 국립극단의 수선화를 연출했으며, 그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학과와 드라마센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대우교수로서 교편을 잡았다.
  • 1960년 국립창극단의 심청전 연출로 참여했고,
  • 1969년 극본 김대건 신부 와 해결되지 않는... 을 창작, 발표하다.
  • 1970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의 한여름밤의 꿈을 연출,
  • 1972년 중앙대 예술대 학생들의 백의종군 연출을 맡았다. 그러나 에저토 창고극장이 경영난으로 폐관의 위기에 처하자 그가 인수하여 운영하였으며,
  • 1976년 삼일로 창고극장을 열고, 극장장이 되었다. 삼일로 창고극장 대표로 있으면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드물던 연중무휴공연을 계속 진행하며 연극인과 신인 극작가와 연출가 등을 발굴, 배출했다. 또한 프로덕션 시스템으로 <빨강피터의 고백>을 성공시켰다.
  • 1976년 국립창극단의 춘향전의 연출과 1978년 드라마센터의 오델로의 연출로 활동했다.
  • 1988년 일본에 초청되어 일본 극단 발견의회가 기획한 귀두혹상(鬼頭惑象)의 연출을 맡았다.

상훈 경력[편집]

저서 및 논문[편집]

저서[편집]

  • 이원경 연극연출론 (현대미학사, 1997)
  • 불멸의 처 (평민사, 1999)
  • 이원경 연극화술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2003)

논문[편집]

  • 연극연출론, 1976
  • '한문권의 한국과 일본의 언어 및 TV방송 화술의 문제점들' <한국연극> 1998년 11월호

기타[편집]

배우 추송웅을 발굴하여 스타로 부상시켰다.

평가[편집]

박정희, 전두환 정권 당시 공연법 개정을 위한 설득과 호소 등의 노력을 기울여 성사시켜, 대학로 극장가를 형성하는 발판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