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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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王象, ? ~ ?)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는 희백(羲伯)[1]이며 사례 하내군 사람이다.

행적[편집]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병주로 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었다.

17, 8세 즈음에 양을 치면서도 사사로이 책을 읽어 주인에게 매질을 당했다. 당시 병주로 피신해 있었던 같은 군 사람 양준이 왕상의 자질을 보고 기뻐하여 그를 사서 해방시켜 주었고, 혼인을 맺어주고 집까지 지어준 후 헤어졌다.

훗날 병주자사 양습이 주의 명사들을 천거할 때 상림·양준·왕릉·순위와 함께 발탁되었고, 조조는 모두 현장에 임명하였다. 건안 연간에 순위 등과 함께 당시 위의 태자이던 문제에게 예우를 받았다.[1] 왕찬, 진림, 완우, 노수(路粹) 등이 모두 죽은 후의 신인들 중에서, 그 재주가 최고였다.[1] 조위 황조가 성립된 후에는 산기시랑이 되었으며, 상시로 승진하고 열후가 되었다.[1] 중국사 최초의 유서로 꼽히는 《황람》을 편찬하라는 조명을 받음과 함께 비서감을 겸했다.[1]

황초 3년(222년), 문제가 남쪽으로 순행하면서 완(宛)[2]에 이르렀는데 저자에 활기가 없었다. 당시 백관들에게 군현에 간여하지 말라는 조서가 왔었는데, 완(宛令)이 조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자 문을 닫았다.[1] 문제는 대노하여 완령과 남양태수 양준을 체포했다.[1] 문제가 상서에게 “명제는 이천석(二千石)[3] 몇을 죽였는가?”라고 묻는 것을 본 왕상은, 문제가 양준을 살려두지 않을 것을 알고 그의 앞에서 피가 얼굴에 흐르도록 머리를 찧으면서 양준의 처벌을 죽음에서 하나 감해 주기를 청했다.[1] 문제가 답하지 않고 형을 집행하려 들어가려 하자, 왕상은 문제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에 문제는 왕상을 돌아보고 말했다.[1]

나는 경과 양준 사이의 일을 안다. 오늘 내가 경의 말을 들으면, 이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경은 정녕 양준을 무시하겠는가, 나를 무시하겠는가?

[1]

왕상은 더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돌아갔으며, 양준은 결국 죽었다.[1] 왕상은 양준을 살려줄 수 없었음을 한탄하여, 결국 병이 나 죽었다.[1]

출전[편집]

각주[편집]

  1. 어환(魚豢)(, 《위략》 (진수, 《삼국지》 권23 화상양두조배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
  2. 남양군의 속현이다.
  3. 태수나 자사의 봉록이 2천석급으로 규정된 데에서 유래한, 태수나 자사의 별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