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언 래티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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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 래티모어

오언 래티모어(영어: Owen Lattimore, 1900년 7월 29일 ~ 1989년 5월 31일)는 미국의 중국학자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매카시즘(적색공포)의 표적 중 한 명으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편집]

초기[편집]

워싱턴 D.C. 출신이며, 어린 시절을 중국톈진에서 보냈다. 그의 부모인 다비드와 마가렛 래티모어는 영어 교사로써 중국의 대학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형제로는 고전 번역가인 리치몬드 래티모어(Richmond Lattimore)가 있었고, 자매로는 아동 작가로 활약했던 앨리너 프랜시스 래티모어(Eleanor Frances Lattimore)가 있었다. 오언 래티모어는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은 뒤, 12살에 중국을 떠나 스위스 로잔 근처의 주립 학교인 콜레지 클라스티크 광토날(College Classique Cantonal)에 입학하였다(1913~191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인 1914년, 오언은 영국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성 비즈 학교(St Bees School)에 통학하였다(1915–1919). 그곳에서 오언 래티모어는 문학, 그 중에서도 시에 관심을 보였으며 잠시 가톨릭에 귀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옥스퍼드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1919년 중화민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에게는 대학에 다닐 충분한 자금이 없었다.[1]

중화민국으로 이주한 오언 래티모어는 처음에는 영어 신문사인 '베이징 톈진 타임즈(Peking and Tientsin Times / 京津泰晤士报)'에서 근무했으며,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영국 상사인 '아놀드 홀딩스(Arnhold Holdings Ltd.)'에서 일하였다. 이때의 경험은 그에게 광범위한 중국 대륙 곳곳을 답사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아직 전근대 왕조의 유풍을 간직하고 있었던 유학자로부터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고, 또한 무역 회사에 몸 담고 있던 시절 그의 비즈니스 관련 출장 경험은 그에게 삶의 현실과 경제에 대한 감각을 기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오언 래티모어의 중국학자로써의 터닝 포인트는 대립 중이던 두 군벌의 노선을 통해 양털 한 묶음의 통행 여부를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이듬해 오언 래티모어는 내몽골을 가로지르는 대상(캐러번)들을 따라 신장 노선 끝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2]

오언 래티모어가 근무하고 있던 무역 회사 아놀드 홀딩스의 경영자들은 그의 답사 여행에 보조금을 주는 것이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아무 이득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지만, 그럼에도 베이징 정부와의 연락 담당자로서 오언이 그들과 함께 마지막 1년을 보내도록 내보냈다. 베이징에서 그의 답사 여행에 나서기 전, 그는 자신의 아내가 될 엘레노어 홀게이트(Eleanor Holgate)라는 여인을 만났다. 이들은 신혼여행으로 베이징에서 인도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고, 이는 육로로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20세기 전반의 거대한 위업이었다. 다만 이러한 계획은 차질을 빚었고 엘레노어 홀게이트는 자신의 남편을 찾기 위해 2월에 400마일(640km)의 거리를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혼자 여행해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여정을 《투르키스탄에서의 재회》(1934년)에서 묘사했고, 오언도 《투르케스탄으로 가는 사막의 길》(The Desert Road to Turkestan , 1928년), 《하이 타르타리》(High Tartary, 1930년)에서 자신의 여정을 묘사했다. 이때의 답사 여행은 몽골인을 비롯하여 다른 실크로드 민족들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그의 평생의 관심의 토대가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1928년, 그는 만주에서 더 많은 답사를 위한 사회과학연구위원회로부터의 지원을 받는 데 성공했고, 그 후 하버드 대학교 인류학부 대학원 학생으로서 1929년까지 통학하며 연구에 몰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박사 과정에 등록하지 않고 대신 하버드-옌칭 연구소와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 재단의 지원을 받아 1930년 중국으로 돌아왔다(~1933년). 그는 중앙아시아를 답사한 공로로 1942년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금메달을 수여받았다.[3]

퍼시픽 어페어스와 태평양문제연구소[편집]

이후 1933년까지 하버드-옌칭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였으며, 1934년부터 1941년까지 IPR의 기관지 '퍼시픽 어페어스(Pacific Affairs)'의 주필을 맡으면서 1938년부터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교수 겸 대학 페이지 국제 문제 연구소장으로 활동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그 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중국 충칭에서 장제스의 특별 정치고문으로 있었으며, 1942년부터 1945년까지 OWI의 태평양 작전 부장을 맡기도 했다.

매카시즘에 휘말려 간첩 혐의로 기소되다[편집]

이후 1952년 조지프 매카시에 의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약 3년여간의 시간 끝에 1955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뒤에는 미국을 떠나 영국에 거주했으며, 1963년 리즈 대학교 중국학부를 창설한 뒤 학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70년에 은퇴하였다. 그 뒤 1989년 로드아일랜드주프로비던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언 래티모어의 유산[편집]

1963년,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새롭게 개설된 중국학과(현재의 동아시아학)에 영입되었다. 그는 중국학을 개설한 것 외에도 몽골학을 진흥시켜 1968년 리즈와 몽골의 좋은 관계를 구축하였으며, 몽골학 프로그램을 수립했다. 이후 1970년 명예교수로써 은퇴할 때까지 리즈에 남아 있었다.

1984년 리즈 대학은 명예 교수 오언 래티모어에게 문학박사(DLitt) 학위를 수여했다.[4]

오언 래티모어는 몽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더 진행하기 위한 연구 센터를 설립하는 데 평생을 헌신했다. 1979년 그는 서양인으로써는 최초로 몽골 공화국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상인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있는 주립 박물관은 1986년 새로 발견된 공룡 화석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5]

미국몽골연구센터는 국제몽골학회, 국립외국어대학교와 공동으로 「오웬 래티모어: 내아시아 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wen Lattimore: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Inner Asian Studies)라는 주제로 2008년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6]

반공주의 미국 좌파의 낭만적인 인물들은 외교 정책에 있어서 오언 래티모어가 끼친 영향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놓았다. 아서 슐레신저 주니어(Arthur Schlesinger, Jr.)는 오언 래티모어가 소련의 스파이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한 동조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시드니 후크(Sidney Hook)는 이와 비슷하게 오언 래티모어를 향해 "아시아 문제에 관한 공산당 계열의 일탈적이고 능숙한 추종자"(a devious and skillful follower of the Communist Party line on Asian affairs)라고 주장했다.[7]

각주[편집]

  1. Newman (1992), 5–6쪽.
  2. Lattimore, Owen (1928) The Desert Road to Turkestan; pp. 5–8. He euphemistically describes the experience as being "sent 'up-country' once to try to get hold of some wool".
  3. “List of Past Gold Medal Winners” (PDF). Royal Geographical Society. 2015년 8월 24일에 확인함. 
  4. University of Leeds, List of Honorary Graduates 1904–2014 Archived 2015-04-04 - 웨이백 머신.
  5. Newman, Robert P (1992). 《Owen Lattimore and the "Loss" of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584쪽. ISBN 9780520073883. 2015년 12월 24일에 확인함. 
  6. The conference website includes links on the conference and Owen Lattimore: "Who was Owen Lattimore?"; Digital Books; Articles; Archives; Bibliography: Bookshop; Conference Presentations [1]
  7. Ronald Radosh, "Sidney Hook Was Right, Arthur Schlesinger Is Wrong," The New York Sun, December 16,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