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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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오노레 지로 Henri Honoré Girau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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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지로 (1943년 1월 19일) | |
| 프랑스의 국가해방위원회 의장 | |
| 임기 | 1943년 6월 3일~1943년 11월 9일 |
| 프랑스의 민군최고사령부 사령관 | |
| 임기 | 1942년 11월 13일~1943년 6월 3일 |
| 전임 | 프랑수아 다를랑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879년 1월 18일 |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 사망일 | 1949년 3월 13일 |
| 사망지 | 프랑스 디종 |
| 정당 | 자유공화당 |
| 군사 경력 | |
| 복무 | |
| 복무기간 | 1900년~1948년 |
| 소속군 | 프랑스 육군 |
| 최종계급 | 육군 장군 |
| 지휘 |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상훈 | 레지옹 도뇌르 |
앙리 오노레 지로(프랑스어: Henri Honoré Giraud; 1879년 1월 18일 – 1949년 3월 11일)는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42년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의 탈출과 이후 레지스탕스의 지도자 중 한 명이자 샤를 드골의 경쟁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드골과의 정치적 주도권 다툼에서 밀려 1944년 4월 사임하였다.
지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경력이 있으며, 1914년 생캉탱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바 있다. 이후 1917년 라말메종 전투에서 말메종 요새를 점령한 대대를 지휘하며 공을 세웠고, 1925년 리프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하이 아틀라스 지역의 부족들을 평정하였으며, 1936년 메스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샤를 드골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지로는 제7군 사령관을 맡았으며,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0년 5월 프랑스 전투 중 브레다 작전을 실행해야 했다. 그는 패주하던 제9군의 지휘를 맡았으나 곧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지로의 가족과 참모들로 구성된 공모자들이 그의 쾨니히슈타인 요새 탈출 계획을 세웠고, 이후 제2국이 이에 관여했다.
1942년 4월 비시 프랑스로 성공적으로 탈출한 지로는 숨어 지내며 연합국과 접촉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는 프랑스의 지도자로 미국이 지지하는 후보로 지로를 선택했고, 11월 연합군의 상륙 이후 북아프리카의 프랑스군 지휘권을 인수했다. 12월 프랑수아 다를랑이 암살되자 지로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및 서아프리카 고등판무관이 되었다. 그의 재임기 동안 프랑스의 역사는 비시의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나아가는 더딘 과정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1943년 1월, 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드골과 함께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석했다. 3월 지로는 비시 정권과의 결별과 민주주의 원칙 수용을 선언하는 기념비적인 연설을 했다. 6월 지로와 드골은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를 구성하여 공동의장이 되었다. 주도권을 잃고 사임한 후, 1944년 8월 암살 시도를 겪기도 했다. 전후 지로는 프랑스 제4공화국의 헌법을 수립할 1946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디종에서 사망했다.
유년기와 교육
[편집]앙리 오노레 지로는 1879년 1월 18일 파리에서 루이(1916년 사망)와 마리 지로의 아들로 태어났다.[1][2]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참전 용사로, 파리 공성전 당시 17세의 나이로 국민위병대에 입대했었다.[2] 지로는 콜레주 스타니슬라스, 리세 루이르그랑, 리세 보쉬에에서 서양고전학을 공부했다.[1]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1 2 “Henri Giraud 1879-1949”. 《Chemins de Mémoire》. Ministry of Armed Forces.
- 1 2 Giraud 2014, ch. 1: L'Avant-guerre; ch. 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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