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스비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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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 전쟁
교전국
프로이센의 기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의 기 오스트리아 제국
덴마크의 기 덴마크
스웨덴의 기 스웨덴
노르웨이의 기 노르웨이[1]

슐레스비히 전쟁은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둘러싸고 1848년부터 1864년까지 일어난 덴마크와 독일간의 전쟁이다.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편집]

1848년 3월 킬에서 친독일 성향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자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덴마크프레드릭 7세는 공국 연합의 해체를 선언하였고, 독일 연방의회는 프로이센에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의 요청을 받은 프로이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슐레스비히를 향해 진군했다.[2] 하지만 역사는 프로이센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강대국들이 개입하면서 프로이센 국왕 프레드릭 4세 윌리엄은 슐레스비히 점령이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한편 덴마크는 슐레스비히를 홀슈타인으로부터 분리할 것을 요구했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덴마크를 지지했다. 1849년 2월 23일, 덴마크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스비히 문제가 덴마크의 요구에 따라 처리되지 않는다면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투는 4월까지 계속되었다. 프로이센 군대는 슐레스비히를 지나 유틀란트까지 진군했으나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협상은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분쟁으로 인해 세 번의 전쟁과 휴전이 반복되었고, 전쟁 전체를 통틀어 덴마크가 승리의 기쁨을 누린 것은 이스테드 전투뿐이었다. 이스테드 전투는 아주 미미한 전투였지만 그 전투에서의 승리는 덴마크인들에게 일시적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덴마크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은 1852년 5월 8일, 유럽의 강대국들[3]이 참여한 가운데 런던에서 체결되었다. 강대국들은 전전(戰前) 상태로의 복귀를 택했고,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영유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협정의 이면에는 슐레스비히가 덴마크에 병합되는 것이 유럽의 세력균형 및 평화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강대국들의 기대가 깔려 있었다.

협정 체결 후, 슐레스비히의 통치 조직은 친덴마크 왕당과 관료들을 중심으로 재건되었다. 이로 인해 30여명의 혁명 지도자들(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자들)이 추방당했다. 덴마크 정부는 슐레스비히의 언어를 북부는 덴마크어로, 남부는 독일어로 하되 두 언어가 혼용되는 지역은 덴마크어를 공식 언어로 한다는 포고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정책에 대해 반대했다. 그들은 덴마크의 언어 정책이 결국 슐레스비히를 덴마크 쪽으로 기울게 한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독일 급진파들은 1848년 혁명의 여파로 덴마크가 입헌적 개혁을 이룬데 반해,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이 방해받음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편집]

1852년 이후 10년간 유럽의 정세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연방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당시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일부였다.) 독일 여론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여론은 슐레스비히를 독일 연방에 합병 할 것을 요구했다. 이 무렵 덴마크는 슐레스비히를 홀슈타인으로부터 분리하여 자국의 통치권을 아이더 강 유역까지 확대하고자 했다. 1863년 11월 13일, 덴마크 의회는 이와 관련된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역사는 더 이상 덴마크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국왕 프레드릭 7세가 관련 법안의 서명을 앞두고 사망하면서 덴마크의 미래에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안 9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글뤽스부르크(독일어: Glücksburg(덴마크 올덴보르가에서 분리된 왕가)왕조를 열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크리스티안 9세는 법안 서명을 망설였고,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 덴마크 법률이 협정 위반이라고 생각한 아우구스텐부그크 공작은 자신을 통일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공작이라고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프로이센 장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을 지지했다. 나아가 그는 오스트리아를 설득하여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과 비스마르크 및 오스트리아 정부는 한 목소리로 덴마크에 대해 독일 연방의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구체적 요구 사항을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 통치권 확대 내용을 담은 법률을 무효화할 것.
  • 덴마크 현 정부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함과 동시에 새 정부를 구성할 것.
  • 홀슈타인에 주둔하고 있는 덴마크 군대를 철수시킬 것

전쟁을 피하기 어렵게 된 덴마크는 슐레스비히의 남쪽 국경 진지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864년 2월 1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브랑겔(Friedrich Wrangel) 장군의 지휘 아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아이더 강 유역의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진군했고(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덴마크 군대는 방어선에서 후퇴했다. 덴마크의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고, 퇴각을 명령했던 장군의 파면을 요구했다.

당시 독일은 덴마크보다 훨씬 더 현대적인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성능 면에서 덴마크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독일 화포는 넓은 피오르를 가로질러 포격을 가할 만큼의 사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덴마크 군대가 전쟁을 대비해 급조한 방어선 배후 지역까지 포격을 가할 정도로 강력했다. 슐레스비히 전쟁 중, 범스칸디나비아주의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4]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온 소수의 지원병들과 함께 덴마크는 외로운 전투를 해야했다. 전쟁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독일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 지역의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1864년 슐레스비히 전쟁 패전 이후, 런던에 모인 강대국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은 그저 프로이센의 장래가 일시적이며, 슐레스비히가 덴마크의 영토인 것이 분명한 만큼 국제적 공조를 통해 덴마크의 조속한 영토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뿐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독일은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급부상하였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상실은 덴마크의 민족적 자유주의자들의 몰락을 재촉했다. 1866년 보수 정부는 새 헌법을 기초했다. 하원 구성을 위한 의원 선거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상원 의석은 토지 소유자와 고액 납세자에게 배분되었다. 그 결과 의회 정치는 상·하원의 노선에 따라 양극화되었다. 개혁 성향의 하원은 상원과 번번히 충돌했드며, 양원의 갈등은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참고 문헌[편집]

  • 토니 그리피스 지음.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유럽 스칸디나비아》. 차혁 옮김. 도서출판 미래의창. ISBN:9788959890392
  1.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공식적인 참전이 아닌 소수의 지원병이 자원해서 참전하였다.
  2.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1848~1850. 덴마크인들은 '3년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3. 덴마크, 스웨덴, 영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
  4. 다만 문학과 예술 면에서 슐레스비히 전쟁이 남긴 흔적은 결코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