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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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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이시
Robert Reich
제22대 미국 노동장관
임기 1993년 1월 20일~1997년 1월 20일
전임 린 M. 마틴
후임 알렉시스 허먼
대통령 빌 클린턴

이름
본명 Robert Bernard Reich
신상정보
출생일 1946년 6월 24일(1946-06-24)(80세)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학력 다트머스 대학교 (BA)
유니버시티 칼리지 (MA)
예일 대학교 (JD)
정당 민주당
배우자 클레어 돌턴 (1973년-2012년;이혼)
페리언 플래허티
자녀 2
웹사이트 robertreich.org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로버트 버나드 라이시(Robert Bernard Reich, 1946년 6월 24일 ~ )는 미국정치인, 교수이자 변호사이다. 그는 또한 정치 논평가로서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나누기도 했으며 대통령들 제럴드 포드지미 카터를 위하여 일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빌 클린턴 대통령 아래 제22대 노동장관이었으며 또한 경제적 사안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조언하기도 했다.

2006년 이래 라이시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골드먼 공공 정책 대학원에서 교수를 지내왔다. 그전에 그는 하버드 대학교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2008년 타임 잡지는 한세기의 최고 내각 일원 10명 중의 하나로 불렀다. 월스트리트 저널도 또한 그를 가장 영향적 기업 사상가들 중의 하나로 명단에 놓았다.

라이시는 많은 인기있는 책들을 저서했으며 〈국부의 발견〉(1991년)과 〈위기의 자본주의〉(2015년)를 포함한다. 그는 또한 제이컵 콘블러스와 함께 영화들을 만들기도 했으며 그들의 영화 《모두를 위한 불평등》은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감시 그룹 커먼 코즈와 연루되었고 Robertreich.org에 블로그를 쓴다.

어린 시절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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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유대인 집안에게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의류점을 소유하였다. 10대로서 라이시는 다발성 골단 이형성증과 진단되어 이 상태는 그를 평균보다 짧게 만들었다.

자신의 신장 때문에 라이시는 어쩌다 괴롭힘을 당했다. 그는 선배들로부터 보호를 찾았으며 그들 중 하나는 마이클 슈베르너였다. 이후에 슈베르너는 미시시피주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투표하는 데 등록하는 것을 도움을 준 동안 1964년 살해되었다. 라이시는 이 사건이 "불량배들과 싸우고"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 데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존 제이 고등학교를 다닌 라이시는 장학금을 얻어 1968년 역사학 학위와 함께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고나서 유니버시티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수학하러 로즈 장학금을 얻었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빌 클린턴을 만났다

라이시는 베트남 전쟁을 위하여 징병되었지만 자신의 신장 때문에 육체적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다. 그는 4 피트 11 인치 (1.50m)이며 최저 신장은 5 피트 (1.52m) 였다. 1970년 그는 옥스퍼드로부터 자신의 인문사회 석사를 얻고, 이후에 예일 법학대학원에서 법학 학위를 땄다. 예일에서 그는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의 동창이었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라이시는 정부에서 판사변호사들을 위하여 일했다.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를 연방거래위원회에서 역할로 임명하였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라이시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하였으며 이 동안 그는 몇몇의 책과 기사들을 썼다.

제22대 노동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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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동부에 있는 라이시의 공식 초상화

빌 클린턴은 자신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라이시의 아이디어들을 이용하였다. 클린턴이 승리한 후, 그는 자신의 새로운 팀을 위하여 경제 정책을 선도하는 데 라이시를 의문하였다.

1993년 1월 21일 라이시는 제22대 노동장관이 되었으며 그의 임명은 모두에 의하여 찬성되었다. 그는 클린턴의 팀의 매우 강력한 일원으로 보여으며 그가 대통령과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미국 노동부를 위하여 큰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시는 노동부가 다른 기관들과 가깝게 일하기를 원했으며 상무부교육부를 포함하였다. 그는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함께 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직업 훈련, 그리고 도로와 다리들을 향상시키는 것에 더욱 많은 정부의 지출을 원했다.

라이시는 또한 많은 다른 주제들에 클린턴 대통령을 조언하기도 했으며 보건, 교육과 기술을 포함하였다. 그는 자신을 "미국 노동력의 장관"으로 불렀으며 또한 자신이 "국가의 최대 자산의 중앙은행장"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라이시는 행정부에서 다른이들과 불동의했으며 어떤이들은 국가 부채를 줄이는 것 만에 전념하기를 원했으며 이것은 경제 성장을 위한 라이시의 계획들을 보류하였다. 아 동안 그는 가족 및 의료 휴가법을 실행에 옮겼으며 또한 국가의 최저 임금 인상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무역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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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시는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의 강한 지지자였으며 이 협정은 이전 행정부에 의하여 처음으로 논의되었다. 노동자들과 환경을 위한 협정들을 추가한 후, 클린턴 대통령을 그것을 지지하였다. 라이시는 클린턴 행정부를 위하여 주요 연설자로 북미자유협정을 반대한 노조들의 의견에 반박하였다.

1993년 라이시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미국에서 실직을 유발할 것으로 노조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그것이 멕시코에게 잃을 것보다 미국에서 더욱 많은 직업들을 창조할 것을 믿었다. 그는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자유 무역이 직업과 생활 수준들에서 큰 증가로 선도했다는 것을 말했다.

라이시는 큰 변화들은 사람들이 융통성 있게 행동해 줄 필요가 있으며 그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새로운 능력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북미자유협정에 반대는 경제적 변화에 관한 국민들의 더욱 걱정거리였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의원들에게 협정을 지지하도록 말했다. 북미자유협정은 통과되었고 1993년 12월 법률이 되었다.

몇년 후에 라이시는 비슷한 무역 거래들에 관하여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 북미자유무역협정의 노동자와 환경 보호를 강화하는 데 더욱 일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말했다.

영향력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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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즈음에 라이시의 아이디어들은 행정부에게 적게 중앙적이었으나 그해 선거에서 민주당의 많은 의석들을 잃자 그는 다시 중요해졌다. 그러고나서 클린턴 대통령은 어떤 라이시의 아이디어들에 전념하였다. 이것들은 중산층을 위한 세금 삭감과 최저 임금 상승을 포함하였다.

라이시는 또한 기업들에게 주어진 정부의 돈 삭감을 요구하여 이것을 "기업 지원금"으로 불렀다. 그는 이것이 직업 훈련 프로그램들을 위하여 지불하는 단 하나의 방향이었다고 말했으며 또한 어떤 연방 직업 훈련 프로그램들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을 동의하기도 했다. 그는 좋은 것들을 지키고 나쁜 것들을 없애기를 원했다.

1995년 라이시는 영구적으로 파업 노동자들을 대체하는 것으로부터 정부 계약업체를 금지시키는 것을 제안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라이시와 동의하여 행정부의 경제적 계획들에서 라이시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주었다.

라이시는 가끔 새로운 "경제적 기반"의 경제에 관한 연설을 하여 새로운 훈련을 얻는 데 노동자들을 위한 필요성을 강요하였다. 그는 "우리는 대량 생산 경제를 되찾을 수는 없다. 현재의 도전은 일종의 다른 것에 관해서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미국인들의 "경제적 불안정"에 관하여 말했으며 지구촌 경쟁과 기술에 관하여 걱정했던 사람들이었다.

봉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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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라이시는 미국 노동부를 떠나기로 결정하여 자신의 아들들과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1997년 그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자신의 세월에 관한 책을 발행했으며 〈내각에 잠기며〉로 불렸다. 책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들을 공유했으며 또한 어떤 사람과 아이디어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민주당에 기업들에 의하여 "소유되었다"고 말햏으며 또한 워싱턴 D. C.가 2개의 주요 정치적 단체들 - "일자리 지키기" 당과 "내버려 두기" 당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책이 발행된 후, 어떤이들은 그것을 비판하여 책에서 어떤 대화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시는 이후에 보급판에서 이 일부들을 바꾸거나 제거하여 그 "기억은 불완전하다"고 설명하였다.

강의와 공공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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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를 떠난 후, 라이시는 1997년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교수가 되었다. 거기서 학생들이 그를 2003년 "올해의 교수"로 선정하였다.

2006년 라이시는 교수로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가입하여 빈부 차이에 관한 인기있는 과정들을 강의한다. 그는 또한 경제 개발을 위한 블럼 센터의 이사회에 있기도 한다. 이 센터는 세계를 주위로 극심한 빈곤과 질병을 해결하는 일을 한다.

주지사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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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라이시는 매사추세츠주지사를 위하여 출마했으며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패했다. 그는 또한 〈간단하게 말할께요〉로 불린 자신의 캠페인에 관한 책을 저서하기도 했다. 라이시는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데 주지사를 위한 첫 후보였으며 또한 사형에 반대하기도 했다. 적은 돈과 함께 마저 그는 예비 선게에서 2위로 왔다.

2005년 어떤이들은 라이시가 다시 주지자를 위하여 출마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대신 그는 더발 패트릭을 지지하여 이후에 패트릭은 2006년 선거를 승리하였다.

의견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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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의 라이시

2004년 라이시는 〈이유:왜 자유주의자들이 미국을 위한 전투를 이길 것인가〉로 불린 책을 발행하였다.

그는 또한 라디오 프로그램 〈마켓 플레이스〉를 위하여 매주 기사를 썼으며 자신이 시작하는 도움을 주었던〈아메리칸 프로스펙트〉잡지를 위한 정규적 기자였다. 그는 또한 《쿠들로 리포트》같은 텔레비전 쇼들에 나오기도 했다.

2016년 이래 그는 〈뉴스위크〉잡지를 위하여 의견란들을 썼다.

2013년 그는 영화 제작자 제이컵 콘블러스와 함께 도큐멘터리《모두를 위한 불평등》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라이시의 저서 〈여진〉에 기반을 두었으며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하였다.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 의하여 선택되었으며 영화에서 라이시는 어떻게 큰 기업들이 정치적 권력을 얻었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모든 국민들이 이 권력에 균형을 이루는 데 연루되어야 하는 것을 제안한다.

2022년 라이시는 《심슨 가족》의 한 에피소드에 나왔으며 잠시 미국 중산층의 경제적 쇠퇴를 설명하였다.

2021년 이래 라이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일간 신문을 썼으며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들에 자신의 생각들을 공유하였다. 1백만 이상이 그것을 구독한다.

정치적 의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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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서 열린 진보 정치·정책 회의에서 (2009년 4월 6일)

2008년 라이시는 부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여 자신이 단지 목적 자체를 위해 누군가의 부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국가가 필요성을 위하여 지불할 수 있는가에 근심이 갔다. 그는 사회 안전과 생산성을 만드는 것들을 위하여 세금이 지불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라이시는 근로소득 세액공제를 확장시키는 것을 지지하며 이것은 저소득층을 위한 임금 보충금이다. 그는 부유층들에 더욱 높은 세금과 함께 그것을 위하여 지불하는 것을 제안한다. 그는 또한 저소득층 공동체들을 위하여 교육에서 투자하는 것을 믿기도 하며 초기 아동 교육과 대학 진학 기회 학대를 포함한다.

라이시는 노조의 매우 지지적이며 노조들이 노동자들과 경제를 위하여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2014년 그는 자신이 한 시간당 15 달러로 연방 최저 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에 호의를 가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큰 기업들에게 아픔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또한 더욱 가치 있는 근로자들에게 선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이시는 또한 보편적 기본 소득을 지지하며 그들의 소득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정규적인 지불이다. 그는 2016년 국가들이 결국적으로 이 아이디어를 이용하는 필요가 있을 것을 말했다.

라이시는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정착촌 건설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어 또한 가자에서 논쟁에 관하여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이 이스라엘에게 무기들을 제한시켜야 하는 것을 믿는다.

2008년 라이시는 대통령을 위하여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으며 2016년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였다. 그는 또한 2020년 샌더스와 엘리자베스 워런을 지지하였다. 샌더스가 자신의 2016년 선거 운동을 끝낸 후, 라이시는 지지자들에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도록 독려하였다.

2020년 라이시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에서 주요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했다. 2021년 이래 라이시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로부터 트럼프를 제거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2022년 그는 트위터를 차지하는 데 일론 머스크의 노력들을 비판하여 "억제 되지 않은" 인터넷의 아이디어를 "위험하다"고 불렀다.

2022년 라이시는 플로리다주지사 론 디샌티스를 "파시스트"로 불렀다. 이듬해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칭송하여 그를 "영리하고, 신중하며, 절제되었다"고 불렀다.

개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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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라이시는 클레어 돌턴에게 결혼했으며 2012년 이혼하였다. 부부는 2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아들 한명 샘은 드롭아웃의 최고경영자이다. 다른 아들 애덤은 사회학 교수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후에 페리언 플래허티에게 재혼하였다.

라이시는 왜소증의 형성인 다발성 골단 이형성증과 함께 태어나 신장 4 피트 11 인치이다. 2023년 그는 자신의 신장을 설명하는 블로그 게시물을 썼다.

2020년 라이시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도시 위원회에 편지들을 써 자신의 저택 근체에 신규 주택 건설에 반대하였다.

2023년 라이시는 《브레이킹 뉴스》로 불린 쇼에 카메오 출연을 하여 자신의 아들 샘의 일생에 관한 가상의 버전을 연기하였다.

수상과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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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올해의 최고 정치적 저서로 브루노 크라이스키 상
  • 2003년 10월 경제와 정체에 자신의 저작으로 바츨라프 하벨 재단 VIZE 97 상
  • 1984년 전미행정학술원 루이스 브라운로 상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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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기업활동 살피기〉(1982년)
  • 〈다음 미국의 전선〉(1983년)
  • 〈뉴딜:크라이슬러 리바이벌과 아메리칸 시스템〉(1985년 존 도너휴와 공동 저서)
  • 〈새로운 미국의 이야기들:불안한 진보주의자를 위한 미래 가이드〉(1987년)
  • 〈다시 부상하지 않는 자유주의자:그리고 다른 시대착오적 예언들〉(1989년)
  • 〈공공 아이디어들의 권력〉(1990년 편집자)
  • 〈민주 사회에서 공공관리〉(1990년)
  • 〈국부의 발견:21세기 자본주의를 위한 우리 자신들 준비〉(1991년)
  • 〈내각에 잠기며〉(1997년)
  • 〈성공의 미래:새로운 경제에서 일과 삶〉(2000년)
  • 〈간단하게 말할께요:품위있는 근로 사회를 위한 본질〉(2002년)
  • 〈이유:왜 자유주의자들이 미국을 위한 전투를 이길 것인가〉(2004년)
  • 〈슈퍼자본주의:비지니스, 민주주의와 일상 생활의 변환〉(2007년)
  • 〈여진:다음의 경제와 미국의 미래〉(2010년)
  • 〈격노를 넘어:우리의 경제, 우리의 민주주의와 함께 무엇이 잘못되어 갔으며 어떻게 고쳐야 하나〉(2012년)
  • 〈위기의 자본주의:권층 소수가 아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여〉(2015년)
  •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2017년)
  • 〈공동선〉(2018년)
  • 〈시스템:누가 조작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2020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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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도큐멘터리들은 제이컵 콘블러스와 함께 만들었다 -

  • 《모두를 위한 불평등》(2013년)
  • 《위기의 자본주의》(2017년)
  • 《라스트 클래스》(2025년)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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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린 M. 마틴
제22대 미국의 노동장관
1993년 1월 20일 ~ 1997년 1월 20일
후임
알렉시스 허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