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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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군(魯郡)은 중국의 옛 군이다. 군국제 시행 시에는 노국(魯國)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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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 정 23년(기원전 224년), 옛 노나라 땅에 설치되었고, 이때는 설군(薛郡)이라 하였다.

현명 한자 대략적 위치 증거
산둥성 취푸시 노고성(魯故城) 진나라 봉니 “노승지인”(魯丞之印)
무염 無鹽 산둥성 둥핑현 진나라 봉니 “무염승인”(無鹽丞印)
임성 任城 산둥성 지닝시 남동 진나라 봉니 “임성승인”(任城丞印)
산둥성 텅저우시 남 22 m 설현고성(薛縣故城) 터 진나라 봉니 “설승지인”(薛丞之印)
산둥성 텅저우시 부근 진나라 봉니 “피승지인”(蕃丞之印)
평륙 平陸 산둥성 원상현 진나라 관인 “평륙승인”(平陸丞印) 등
방여 方輿 산둥성 위타이현 진나라 봉니 “방여승인”(方輿丞印)
산둥성 쩌우청시 기왕고성(紀王故城) 유지 진나라 봉니 “추승지인”(鄒丞之印) 등
영양 寧陽 산둥성 닝양현 상가항에서 출토된 진나라 봉니 “영양가승”(寧陽家丞) 등
문양 汶陽 산둥성 닝양현 북동 진나라 봉니 “문양승인”(汶陽丞印)
산둥성 쓰수이현 진나라 봉니 “변승지인”(卞丞之印)
[1] 산둥성 짜오좡시 진나라 봉니 “증승지인”(承丞之印)
음평 陰平 산둥성 짜오좡시 남서(한나라) 전국 제나라 병기 “음평좌고지조”(陰平左庫之造)
건양 建陽 산둥성 짜오좡시 남서(한나라) 전국 진나라 병기 “건양”(建陽)과
평양 平陽 ? 전국 위나라 방족포에 “평양”
산둥성 닝양현 북동 강성진(刚城镇) 운몽초간 《편년기》에 “37년, ??강(剛)”
산둥성 텅저우시 등현고성(滕縣故城) 《사기·항우본기》에 “등공”(滕公) 등
호릉 胡陵 산둥성 위타이현 남동 《전국책·진책 사》에 “위씨의 장수가 출병해 유·방여·질·호릉·탕·소·상을 쳤다.” 등
하구 瑕丘 산둥성 옌저우구 《사기·항우본기》에 “하구의 신양이라는 자는 장이의 폐신이다.” 등
항보 亢父 산둥성 지닝시 남 장촌고성(張村古城) 《사기·고조본기》에 “패공이 군을 항보로 돌려…(후략)” 등
수창 須昌 산둥성 둥핑현 수성촌고성(須城村古城) 《수경·제수주》에

“제수는 또 북으로 수구성(須胊城)을 서쪽으로 지나니, 성이 제수 가에 있는데, 옛 수구국이다.

……또 북으로 수창현 서쪽을 돈다.

경상번이 가로되: 수구(須胊)는 한 나라가 두 성 양쪽을 다 이름에 쓴 것이니,

아마 수창(須昌)으로 옮겼고 구(胊)가 예전 도읍일 것이며, 진나라가 현으로 삼았다.” 등

산둥성 타이안시 누덕진(楼德镇) 전시성촌(前柴城村) 1977년 산둥성 신타이시 적진(翟镇)에서 출토된 전국 제나라 병기 “시내우”과(柴內右)과

전한[편집]

고제 6년(기원전 201년), 유교초나라에 봉해지면서 설군은 초나라의 지군이 되었다. 고후 6년(기원전 182년)에 초나라에서 나와 노나라로 개편되어 장언이 봉해졌고,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에 다시 설군이 되어 초나라에 흡수되었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에 다시 초나라로부터 떨어져 전한의 직할이 되었고, 이듬해 오초칠국의 난 진압 후 노나라로 부활하여 유여가 노왕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설군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계속 노군 또는 노나라가 되었다.

예주자사부에 속했다.[2]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18,045호, 607,381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3][2]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6현이다.

현명 한자 대략적 위치 비고
노현 魯縣 지닝 시 취푸 시 백금의 봉지였다. 5만 2천호가 있다. 철관이 있다.
변현 卞縣 지닝 시 쓰수이 현 동부 사수가 남서에서 방여현에 이르러 패수로 들어가니, 노·제음·산양 3군을 지나 500리를 간다. 청주천(靑州川)이다.
문양현 汶陽縣 타이안 시 닝양 현 북동부
피현 蕃縣 짜오좡 시 텅저우 시 남량수(南梁水)가 서쪽으로 호릉현에 이르러 패거[4]로 들어간다. 응소에 따르면 옛 주(邾)나라[5]다.
추현 騶縣 지닝 시 쩌우청 시 남동부 주나라로, 조성이며, 29세를 전해오다 초나라에 멸망했다. 역산(嶧山)이 북쪽에 있다.
설현 薛縣 짜오좡 시 텅저우 시 남부 하나라의 거정(車正) 해중(奚仲)의 나라로, 후에 비(邳)로 천도했고, 탕의 재상 중훼(仲虺)가 여기 살았다.

다음은 노왕국에서 갈려나온 왕자후국으로, 총 21국이다. 이 중 한서 지리지의 현황으로 추측되는 원연·수화지간(기원전 8년) 이후 봉해진 후국이 1국이다.[6][7][8]

이름 봉해진 때 폐해진 때 왕자후표의 말격 지리지의 소속 군
광척(廣戚)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원정 5년(기원전 112년)

동해[9]

영양(寧陽) 원삭 3년(기원전 126년) 10월 ? 태산
하구(瑕丘) ? 산양
공구(公丘) 시건국 원년(9년)
욱랑(郁桹)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서창(西昌)
난기(蘭旗) 시원 5년(기원전 82년) ? 동해[10]
용구(容丘) ? 동해
양성(良成) ? 동해
창려(昌慮) 감로 4년(기원전 50년) 윤월 ? 태산[11] 동해
평읍(平邑) 초원 원년(기원전 48년) 동해 태산[12]
산향(山鄕) ? 동해 동해
건릉(建陵) ? 동해 동해
합양(合陽) 건시 원년(기원전 32년) 동해 동해[13]
동안(東安) ? 동해 동해
승향(承鄕) 홍가 2년(기원전 19년) 동해 동해[14]
건양(建陽) ? 동해 동해
오향(郚鄕) 양삭 4년(기원전 21년) 4월 건평 3년(기원전 4년) 동해
건향(建鄕) ? 동해
신양(新陽) 홍가 2년(기원전 19년) 5월 ?

영양·하구 두 후국의 역사는 복잡하다. 두 현 모두 본래 대하군에 속했다고 나오는데,[15][16] 봉해질 당시(기원전 126년) 대하군은 제동국 즉 제후왕국이므로 후국을 거느릴 수 없다. 이때 노나라에 인접한 군은 산양군이므로 우선 산양군으로 옮겨졌다가, 천한 4년(기원전 91년) 산양군이 창읍국이 되면서 이때 대하군으로 옮겨졌고, 감로 2년(기원전 52년) 대하군이 동평국이 되면서 영양은 태산군으로, 하구는 산양군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6]

공구후국은 이미 진나라 시절에 설치되었고 개국공신 하후영의 봉지로 유명한 등현(滕縣)을 둘로 갈라 하나는 피현(蕃縣)으로 하고 나머지 하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6]

왕자후 본인이 아닌 왕자후의 후손으로서 조상과는 다른 지역에 봉해진 후가 하나 있다.

이름 봉해진 때 폐해진 때 조상의 봉국
재향(宰鄕) ? ? 오향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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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전한
문양 문정(汶亭)
추정(騶亭)

각주[편집]

  1. 이름은 현 북서쪽에 있는 증수(承水)에서 유래한다.
  2. 周振鹤 (2006년 6월). 《汉书地理志汇释》. 合肥市回龙桥路1号: 安徽教育出版社. 474 - 477쪽. ISBN 7-5336-4757-2. 
  3. 반고: 《한서》 권28 지리지 제8 하
  4. 왕선겸에 따르면 패거는 제거(泲渠, 濟渠)의 오자이다.
  5. 왕선겸에 따르면 소주(小邾)인데 소 자를 빠트린 것이라 한다.
  6. 周振鹤 (1987년 8월). 《西汉政区地理》 [서한정구지리] (중국어). 北京: 人民出版社. 29 ~ 32쪽. 
  7. 반고: 《한서》 권15 상 왕자후표제3 상
  8. 반고: 《한서》 권15 하 왕자후표제3 하
  9. 광척후국은 초나라에도 있다. 왕선겸은 노나라에서 갈려나온 이 광척후국이 폐해진 후 다시 초나라의 왕자가 봉해졌다고 봤는데, 주진학은 추은령에 따르면 왕자는 왕국에서 봉국을 나누어줘야 하므로 노나라에서 갈려나온 광척현에 초나라 왕자가 봉해질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노나라에서 갈려나온 광척후국은 척후국의 오자로, 곧 동해군 척현이라고 주장했다.
  10. 동해군 난기후국(蘭祺-)으로 보인다.
  11. 창려후 위의 양흥후·이향후·도향후부터 이 노효왕의 8왕자후국은 왕자후표 말격이 지리지의 소속을 비교해 보면 한 줄 밀린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12. 《속산동고고록》(續山東考古錄) 권27에서 말하는 평읍의 위치와, 후한 시대에 발견된 석궐에 기록된 “남무양평읍”(南武陽平邑)을 바탕으로 주진학은 태산군 남무양현이 곧 평읍후국이라고 보았다.
  13. 동해군 합향현(合鄕縣)으로 보인다.
  14. 동해군 승현으로 보인다.
  15. 반고: 《한서》 권75 수양하후경익이전 중 하후승
  16. 《거연한간고석·고증》(居延漢簡考釋考證) 권2, 《서한정구지리》 30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