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양씨 (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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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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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
시조 | 양경문(楊敬文) |
중시조 | 양이시(楊以時) |
주요 인물 | 양공준, 양홍, 양사형, 양시우, 양시진, 양세형, 양세찬 |
인구(2015년) | 17,332명 |
남원 양씨(南原 楊氏)는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양경문(楊敬文)은 고려시대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지냈다. 9세손 양이시(楊以時)가 1355년(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냈다.
역사[편집]
『남원양씨족보(南原楊氏族譜)』에 따르면 시조 양경문(楊敬文)은 고려시대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소목(昭穆)을 빠뜨렸고 2세부터 5세까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9세손 양이시(楊以時)를 중조로 삼는다. 양이시(楊以時)는 1355년(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냈다.
인물[편집]
- 양공준(楊公俊, 1484년 ~ 1525년) : 자는 언경(彦卿). 전라도 순창(淳昌) 구미(龜尾)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구암(龜巖) 양배(楊培)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0년(중종 15)에 별시 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 병조좌랑 겸 춘추관(兵曹佐郞兼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양공준의 진사시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문과합격증인 홍패(紅牌)는 보물 725호로 지정되었다.
- 양홍(楊洪, 1508년 ~ 1564년) : 양공준의 아들.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란(乙卯倭亂)이 일어났을 때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임 중 왜구를 토벌하여 공훈을 세웠다.
- 양사형(楊士衡, 1547 ∼ 1599년) : 양홍의 아들. 자는 계평(季平), 호는 영하정(暎霞亭) 또는 어은(漁隱). 노진(盧稹)·유희춘(柳希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직장(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벼슬을 사임하고 남원에 낙향하였는데, 그 해 여름에 왜적이 침범하자 이대윤(李大胤)·최상중(崔尙重) 등과 군량을 모아 금산의 전지로 보냈다. 1594년윤두수(尹斗壽)가 체찰사로 삼남지방을 순시할 때 그를 참좌하였다. 또 변사정(邊士貞)·정염(丁焰) 등과 의병으로 활동한 공로가 평가되어 병조정랑에 오르고, 이어서 춘추관기사관·경기도사·남평현감(南平縣監)·예조정랑을 거쳐 1599년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임지에서 죽었다. 승정원도승지의 증직이 내리고,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으며, 남원화산사(華山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어은유집』이 있다.[1]
과거 급제자[편집]
남원 양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였다.[2]
- 고려 문과
양수생(楊首生) 양이시(楊以時)
- 고려 사마
양이시(楊以時)
- 문과
양공준(楊公俊) 양몽인(楊夢寅) 양사형(楊士衡) 양시우(楊時遇) 양시정(楊時鼎) 양시진(楊時晉) 양자유(楊子由) 양홍(楊洪)
- 생원시
양공준(楊公俊) 양몽거(楊夢擧) 양몽인(楊夢寅) 양사형(楊士衡) 양세기(楊世基) 양시성(楊時省) 양시익(楊時益) 양여력(楊汝櫟) 양진수(楊震燧) 양형기(楊炯基) 양홍(楊洪) 양회영(楊會榮)
- 진사시
양돈(楊墩) 양사헌(楊士獻) 양석룡(楊錫龍) 양선태(楊善泰) 양시면(楊時冕) 양시진(楊時晉) 양여매(楊汝梅) 양여백(楊汝栢) 양종해(楊宗楷)
항렬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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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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