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익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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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익균
출생 1908년 2월 18일(1908-02-18)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룡천군 외하면 인봉동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룡천군 외하면 인봉동)
사망 2013년 4월 8일 (105세)
국적 대한민국
본관 능성(綾城)
별칭 호(號) 항산(恒山)
학력 신의주보통학교 졸업
오송중국공학대학 정경학부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구익균(具益均, 1908년 2월 18일 ~ 2013년 4월 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28년 신의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3월 신의주 학생 의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해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2013년 국가보훈처는 구익균이 1972년 사문서 위조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1973년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것을 문제 삼아 발인 하루 전인 4월 9일 안장 취소를 유족에 통보했다. 그러나, 사문서 위조는 채권단장으로 영세업자를 돕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군사정권의 정치적 의도로 조세 포탈 혐의도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게 입증되어 중앙행정심판위원회로부터 처분 취소 결정이 내려지면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2]

각주[편집]

  1. “애국지사 구익균 선생, 행정심판 끝에 국립묘지 안장”. 《연합뉴스》. 2013년 11월 29일. 
  2. “오늘의 안장자 명단”. 2013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