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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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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기군(別技軍)은 1881년 (고종 18년) 5월 일본을 롤모델로 삼아서 옛 오군영으로부터 몸이 튼튼한 80명의 지원자를 뽑아 무위영에 소속시켜 창설한 신식군대이다. 별기군이라는 이 군대의 미곡 창고로는 남창이 있었다. 별기군이라는 이 군대는 통리기무아문의 개화 정책에 따라 편성되었다.

양반들을 모아 만든 부대였다. 구식군에서 신식군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갈등도 뒤따랐다. 당시 훈련받던 양반층은 조선말기 부패해가던 지도층이었다.

훈련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礼造)가 맡았다.[1] 신식무기를 사용하여 훈련하였으며, 창설 후 이들은 훈련도감 중 최대 규모의 병영이었던 하도감(下都監)을 훈련장으로 사용한다.[2]

을미사변 후에는 러시아가 영향을 미친다. 아관파천 시절에 프차토이 육군 대령친위대[3]를 교육했다. 부사관 10여명과 2명의 장교를 기간 요원으로 데리고 그는 5개 대대에서 800명의 인원을 차출하여 교육했다.

러시아어 구령에 맞춰서 훈련을 할 정도라 검열하던 고종의 표정이 착잡했다고 한다. 1900년에 복장을 다 러시아 육군 식으로 통일했다. 구식군의 반발은 상당히 심했고 특히 평양 출신의 병들이 심했다고 한다. 러시아 말고도 각 외국 학교들에선 자기들 식으로 교련을 가르쳐 구호도 제각각이였다. 그나마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지면서 정식으로 기틀을 잡아갈 기회를 얻은 듯 했지만, 러일전쟁을사조약을 거치면서 물거품이 된다.

별기군은 기존 구식군대에 비해 급료나 피복 등 모든 대우가 좋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왜별기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며 이후 이러한 차별은 구식 군인들이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1]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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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진속의 역사/신식군대 별기군”. 세계일보. 2007년 1월 25일. 
  2. “<오후여담>동대문운동장”. 문화일보. 2007년 10월 25일. 
  3. 을미사변 당시 궁궐 경비를 맡던 훈련대(訓鍊隊)와 시위대가 서로 교전하자 이후 두 군영을 통폐합하여 친위대를 창설하였다. 허나 얼마 지나지않아 친위대는 시위대가 재창설됨에 따라 규모가 축소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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