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후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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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후 문화 (일본어: 国風文化 고쿠후 분카[*], "국풍 문화")는 일본(日本)에서 10세기 초부터 11세기 셋칸 정치(摂関政治) 시기를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로, 12세기 인세이(院政) 시기의 헤이안 말기 문화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하는 견당사(遣唐使)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정토교(淨土敎)가 유행하였고,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같은 여성 작가들이 활동하였으며 가나 문자(假名文字)가 발생하였다.

중국(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나라(奈良) 시대의 당풍(唐風) 문화와 대조되는 단어로서 이것을 국풍, 또는 와풍(和風)왜풍(倭風) 문화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일본 문화 속에 남아 이어지고 있는 것이 많다.[1]

특색[편집]

견당사 폐지[편집]

간표(寛平) 6년(894년) 일본 조정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건의를 받아들여 견당사 제도를 폐지하였고, 이것은 그 전까지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유입된 문화적 영향에서 탈피할 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해석되어 일본 독자문화가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견당사 폐지 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대외교류가 활발하였고 중국의 문물도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지속적으로 일본에 유입되었다. 때문에 견당사 폐지를 국풍문화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당풍의 문화를 답습하는 한편으로 일본적인 풍토나 생활감정을 지칭하는 이른바 '고쿠후(国風)'를 중시하는 경향이 이미 나라 시대부터 이어져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견당사 폐지란 고쿠후 문화의 시작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킨 요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정토교의 유행[편집]

말법(末法)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정토교 즉 정토신앙이 유행하게 되었다. 9세기 전반에 엔닌(円仁)이 중국 당나라 오대산(五台山)의 염불삼매법(念仏三昧法)을 배워서 히에이(比叡) 산을 중심으로 전수하였고, 당시의 조정 대신이었던 미나모토노 마코토(源信)가 『왕생요집(往生要集)』을 지어 천태정토교(天台浄土教)라 불리던 정토교 신앙을 대성시켰다. 또한 코우야(空也)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정토교의 포교를 행하여 '시장의 성인(聖人)'이라고까지 불렸다. 이러한 정토신앙에 심취해 있었던 교토의 귀족들에 의해 오늘날 고쿠후 문화의 상징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불교건축, 불상, 불화(佛畵) 등에 그 영향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여방문학의 발달[편집]

후지와라(藤原) 집안(후지와라 홋케北家)에 의한 셋칸 정치란 후지와라의 딸을 천황의 비로 들임으로서 그 소생의 황자가 천황으로 즉위하면 황자의 생모의 아버지는 천황의 외조부로서 권력을 장악한다는, 이미 고대 한국이나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외척 정치였다. 후지와라의 자녀를 궁중에 들이고 또 천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유능한 여성을 뽑아 그 옆에서 뇨보(女房)로서 모시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의 뇨보는 수령층 같은 중급 귀족의 자녀가 대부분으로, 중급 귀족들은 후지와라에 발탁될 수 있도록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세이 쇼나곤(清少納言)이나 무라사키 시키부 같은 많은 여성 작가들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가나 문자의 사용[편집]

나라 시대부터 이미 한자(漢字)의 음과 뜻을 빌려 일본어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던 만요가나(万葉仮名)는 이 시대가 되면 가나 문자(히라가나, 가타가나)로서 널리 쓰이게 된다. 가타가나는 한자의 일부에서 그 글자의 모양이 유래하였는데(예: 伊→イ) 한문 훈독을 위한 보조문자로서 쓰였다. 또한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체(草書體)에서 기원한 것으로(安→あ) 주로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기노 쓰라유키(紀貫之)가 편찬한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의「가나서(仮名序)」는 한문 용법의 잔영이 남아있는 한편으로 히라가나로 쓰여진 일본어 문장으로서는 가장 초기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편집]

시가(詩歌)[편집]

  • 고킨와카슈: 엔기(延喜) 5년(905년)에 다이고(醍醐) 천황이 기노 쓰라유키(紀貫之), 기노 도모노리(紀友則), 오오시코우치노 미쓰네(凡河内躬恒), 미부노 다다미네(壬生忠岑) 등에게 편찬하게 한 최초의 칙선(勅撰) 와카집.
  • 와칸로에슈(和漢朗詠集): 간닌(寛仁) 2년(1018년) 무렵에 후지와라노 기미토(藤原公任)가 편찬한 한시집(漢詩集).

이야기집(物語)[편집]

  • 다케토리 이야기(竹取物語):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가나(仮名) 이야기집.
  • 이세 이야기(伊勢物語):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를 주인공으로 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야기집. '노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 우쓰호 이야기(うつほ物語): 견당부사(遣唐副使) 기요하라노 도시카게(清原俊蔭)와 그 자손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집.
  • 오치쿠보 이야기(落窪物語): 의붓형제들의 괴롭힘에 괴로워하던 아가씨가 귀공자와 결혼해 행복해진다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
  •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일본 왕조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수작.

일기・수필[편집]

  • 《도사일기》(土佐日記): 기노 쓰라유키가 도사노카미(土佐守)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교토로 돌아오는 동안의 여정을 그린 일기. 남자임에도 여자의 이야기인 것처럼 가장하여 히라가나로 쓰여진 것이 특징.
  • 《가게로 일기》(蜻蛉日記): 후지와라노 미치쓰나(藤原道綱)의 어머니가 남편 후지와라노 가네이에(藤原兼家)와의 생활에서 느낀 불만을 수록한 일기.
  • 《이즈미 시키부 일기》(和泉式部日記):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가 자신의 연애에 대해서 수록한 일기.
  •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 무라사키 시키부가 궁중에서 뇨보로서 일하던 때의 일을 수록한 일기.
  • 마쿠라노소시》(枕草子): 세이 쇼나곤의 수필. 가모노 조메이(鴨長明)의 《호조키》(方丈記), 요시다 겐코(吉田兼好)의 《쓰레즈레구사》(徒然草)와 함께 일본의 3대 수필로 꼽힌다.
  • 《사라시나 일기》(更級日記): 스가와라노 다카스에(菅原孝標)의 딸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남긴 자전적 형식의 회상록.
  • 《소우기》(小右記):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実資)의 일기(한문).
  • 《미도 간파쿠기》(御堂関白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일기.

기타[편집]

복장[편집]

일본의 습도 높은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소맷부리가 넓어지는 등 통풍이 좋고 풍성한 실루엣의 복장으로 바뀌었다.

남성용[편집]

여성용[편집]

  • 쥬니히토에(十二単)
  • 호소나가(細長)

악기[편집]

간지(寛治) 7년(1093년) 시라카와인(白河院)의 가스가 신사(春日社) 행차. 정면에 와곤과 함께 횡적(横笛), 홀박자(笏拍子) 등을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와곤(和琴): 일본 가가쿠(雅楽)의 국풍가무(国風歌舞)에서 연주되는 일본 고유의 현악기로서 야요이 시대에서 고분 시대에 걸치는 유적에서 이미 와곤의 원형으로 보이는 토용이 발굴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악기로 여겨진다. 다른 이름으로는 야마토고토(大和琴), 아즈마고토(東琴) 등이 있다. 현재도 일본의 궁중 제사에서 연주되는 「가구라우타(神楽歌)」, 「구미노우타(久米歌)」, 「아즈마아소비(東遊)」 등의 국풍가무에만 이용되며, 아악기 가운데 가장 격이 높고 옛날에는 고위 관위를 가진 자만이 그것을 연주할 수 있었다(현재도 궁내청 악부에서는 주로 악단의 지휘자가 연주하고 있다)

현행 와곤의 본체는 주로 오동나무로 만드는데 속은 비어있으며, 나뭇가지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발을 삼는다. 길이 약 190cm에 옆은 머리 부분이 약 16cm이고 꼬리 부분은 약 24cm이다. 현은 비단실로 여섯 줄로 만드는데 꼬리 부분에서부터 비단으로 엮은 아시즈오(葦津緒)라는 끈으로 잇는다. 도래(渡來) 악기에 해당하는 쟁과는 달리 앞에서부터 1, 2, 3, 4, 5, 6현으로 센다.

종교[편집]

  • 어령신앙(御靈信仰)
  • 음양도(陰陽道)
  • 불교는 일본의 교유 신앙인 신도 속으로 포섭되어 일본화하였는데,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로 나타난 신불습합이다. 즉 부처(본지)가 임시로 일본 신도의 신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모든 신도의 신은 보편적인 불교신의 지방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천황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최고 부처인 비로자나불의 지방적 표현이며, 이세의 신대일여래와 연결되었다.

건축[편집]

신덴즈쿠리(寝殿造)라고 불리는, 3품 이상의 고위 귀족 주택의 건축양식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귀족들의 저택은 신덴으로 불리는 중심 건물이 남쪽의 뜰에 접하게 지어지고 그 뜰에는 홍예다리를 놓은 연못을 파서 동서로 대실(對室)이라는 부속 건물을 배치하여 그것들을 다시 복도로 잇고, 동서의 대실에서 또 복도를 남쪽으로 내서 그 앞에 조전(釣殿)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뵤도인(平等院)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 불교건축으로서는 정토교의 영향을 받은 아미타도(阿弥陀堂)가 많이 지어졌다.

  • 법성사(法成寺) 무량수원(無量寿院): 간닌 4년(1020년)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지었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 뵤도인(平等院) 봉황당(鳳凰堂): 덴기(天喜) 원년(1053년)에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가 지었다.
  • 법계사(法界寺) 아미타도: 에이쇼(永承) 5년(1050년) 무렵 니치노 스케나리(日野資業)가 자신의 별장을 내놓아 절로 꾸몄다. 조큐(承久)의 난 때에 화재로 소실된 뒤 재건되었다.

아미타도 이외의 건축으로는 덴랴쿠(天曆) 5년(951년)에 지어진 다이고지(醍醐寺) 절의 오중탑(五重塔)이 유명하다.

조각[편집]

조쵸가 제작한 아미타여래 좌상. 그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아미타여래상을 대량생산하기 위해서 따로 제작된 부품들을 조립해 세우는 기법이 널리 쓰였다. 이 기법은 조쵸(定朝)라는 불사(佛師)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마찬가지로 불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안(治安) 2년(1022년) 법성사 금당과 오대당(五大堂)의 불상을 제작하였고 그 공으로 불사로서는 최초로 법교(法橋)라는 자리를 얻었다. 당시 조쵸의 공방 규모는 몹시 컸는데, 반슈(万寿) 3년(1026년) 8월부터 10월에 걸친 중궁의 순산 기도를 위해 27체(体)의 등신불(等身仏)을 만들 때는 조쵸 휘하에 무려 125인의 불사가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만년의 덴기 2년(1054년)에 제작한 교토 사이인(西院)의 아미타장륙좌상은 당시 조정의 구게들로부터 크게 칭송받았다고 한다.

부드러운 곡선과 곡면으로 처리한, 얕게 평행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듯한 옷의 무늬며 둥근 얼굴에 가느다란 눈을 한 온화하고 명상적인 부처의 표정이 특징으로 나무 하나하나의 중량감이나 물질감을 제거한 듯한 조쵸의 불상은 당시 귀족들의 취미에 부합하는 것으로 귀족들로부터 '부처의 본모습'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의 조각은 기존의 헤이안 전기의 것이 아닌 나라 시대, 덴표(天平) 시기의 고전조각 기법을 배운 것으로 여기에 장식물들을 어울리게 배치하는 등 독자적인 작풍을 여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양식을 조쵸 양식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 뵤도인 봉황당 아미타여래상
  • 법계사 아미타여래상
  • 뵤도인 봉황당 운중공양보살상(雲中供養菩薩像)

회화[편집]

야마토에(大和絵)라고 불리는 일본적인 회화가 발달하였다. 불교미술이나 월차회(月次絵), 사계회(四季絵)라고 불리던 풍경이 그려진 장병화(障屏画, 일종의 산수화 병풍), 벽화(뵤도인 봉황당의 그림 등)가 그려졌는데, 불교 미술을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은 극소수이다. 또한 대부분의 모노가타리에(物語絵, 일종의 삽화)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11세기 말 이전에 제작된 작품은 현존하는 것이 없다. 불교미술에서는 내영도(來迎圖)라 불리는, 자주색 구름을 탄 아미타여래가 임종을 맞이한 불자를 극락정토로 맞이하기 위해 보살과 여러 신중을 거느리고 오는 모습을 테마로 한 회화가 주로 그려졌다.

  • 고야(高野) 산 소장 열반도(涅槃図)(ACE 1086년작)
  • 고야 산 소장 성중내영도(聖衆来迎図)
  • 교토 도지(東寺) 소장 십이천(十二天)(ACE 1127년작)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普賢菩薩像
  • 뵤도인 봉황당 병풍그림(ACE 1053년 전후)
  •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산수병풍(山水屏風)
  •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絵巻): 헤이케(平家) 정권 또는 인세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 진키산연기(信貴山縁起): 인세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
  • 도모 다이나곤 에마키(伴大納言絵巻): 인세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
  • 조수인물희화(鳥獣人物戯画) 갑(甲), 을(乙)의 권(巻): 인세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나머지 병, 정은 가마쿠라 시대의 작으로 여겨진다).

서예[편집]

오노노 미치카제(小野道風)・후지와라노 스케마사(藤原佐理)・후지와라노 유키나리(藤原行成)가 당대의 삼적(三蹟)으로 불렸다. 11세기가 되면 가나 서도(かな書道)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야기레(高野切)가 제작되어 12세기까지 다양한 서풍(書風)으로 전개되었다.

공예[편집]

도검[편집]

일본도(日本刀)의 양식(주조 제작・만곡형 칼날)이 확립된 시기였다.

  • 산조 무네지카(三条宗近)
  • 고가라스마루(小烏丸)
  • 부젠 국(備前国) 도모나리(友成)
  • 도지기리야스쓰나(童子切安綱)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도검이다.

마키에(蒔絵)[편집]

나라 시대에 일본에서 고안된 마키에(蒔絵), 즉 금칠 기법이 크게 발전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후세에는 일본 문화의 「유직고실(有職故実)」의 「정통적인 원류」로 여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고대의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다이카 개신(大化改新)」・「임신의 난(壬申乱)」을 그린 여러 그림들에서 주인공인 태자나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등의 복식은 모두 헤이안 시대의 정장이었던 이칸소쿠타이(衣冠束帯)를 따르고 있으며, 큰 갑옷을 입고 큰 칼을 휘두르는 중세의 모습과 같은 전투를 하고 있다. 고대의 실상이 분명해진 것은 길게 이어진 중세(난세라 불리던)가 막을 내린 근세, 에도(江戸) 시대 중기에 고문사학(古文辞学)・가학(歌学)・국학(国学)・능묘(陵墓) 연구가 활발해지고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