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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셰 박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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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셰 박사의 초상 (첫번째 판)
Portrait of Doctor Gachet
작가빈센트 반 고흐
연도1890
매체캔버스 유화
크기67 x 56 cm
카탈로그
소장처개인 소장
가셰 박사의 초상 (두번째 판)
Portrait of Doctor Gachet
작가빈센트 반 고흐
연도1890
매체캔버스 유화
크기67 x 56 cm
카탈로그
위치프랑스 파리
소장처오르세 미술관

가셰 박사의 초상》(Portrait of Doctor Gachet)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생레미드프로방스정신병원에서 지낸 후, 반 고흐와 함께 지냈던 동종요법 의사이자 화가인[1] 폴 가셰 박사를 묘사하고 있다. 가셰는 반 고흐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를 돌보았다. 이 초상화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으며, 둘 다 1890년 6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려졌다. 두 작품 모두 가셰가 테이블에 앉아 오른팔에 머리를 기댄 모습을 보여주지만, 색상과 양식 면에서 쉽게 구별된다. 또한 에칭 판화도 존재한다.

첫 번째 판은 191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슈테델 미술관이 구입했으나, 이후 헤르만 괴링에 의해 압수되어 판매되었다. 1990년 5월, 크리스티스 경매소 회장 스티븐 래시의 주도로 사이토 료에이에게 8,25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억 달러)에 팔렸으며,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었다. 그 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으며, 슈테델 미술관은 2019년에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두 번째 판은 가셰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상속인들에 의해 프랑스 정부에 기증되었다.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재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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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페라라의 성 안나 병원에 있는 타소》

1888년 말, 반 고흐는 정신적 쇠약을 겪기 시작하며 자신의 귀 일부를 잘라냈다.[2] 그는 한 달 동안 병원에 머물렀으나[2]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고, 1889년 4월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요양원에 스스로 입원하여 1년 동안 머물렀다.[1] 1890년 퇴원하자 반 고흐의 동생 테오는 빈센트가 머물 집을 찾았다. 예전에 가셰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던 카미유 피사로는, 테오에게 가셰 박사가 화가들과 함께 일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추천해주었다. 이에 따라 테오는 형을 오베르에 있는 가셰의 두 번째 집으로 보냈다.[3]

가셰에 대한 빈센트 반 고흐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가셰 박사를 전혀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무엇보다 박사가 나보다 더 아픈 것 같아. 아니면 나만큼 아프다고 해두자.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도랑에 빠지지 않겠니?"[4] 하지만 이틀 후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가셰 박사에게서 진정한 친구를 찾았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서로 너무 닮아서 또 다른 형제 같아."라고 전했다.[5]

반 고흐는 가셰와 머무는 동안 매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여, 가셰의 초상화를 포함하여 70점 이상의 그림을 제작하였다.[6][7]

반 고흐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정신병원에 있는 토르콰토 타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폴 고갱과 함께 몽펠리에를 방문하여 파브르 미술관에 있는 알프레드 브뤼야스의 컬렉션에서 이 그림을 본 후, 반 고흐는 테오에게 그 그림의 석판화 복사본을 찾을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썼다.[8] 3개월 반 전에 그는, 그 그림을 자신이 그리고 싶은 초상화의 한 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시도하고 성취한 그의 '감옥의 타소'와 조화를 이룰거야. 실제 인간을 표현한 다른 그림들과도 어울리겠지. 아! 초상화, 모델의 생각과 영혼이 담긴 초상화, 그것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9]

반 고흐는 1890년 여동생에게 《가셰 박사의 초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가셰 씨를 우울한 표정으로 그렸는데, 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찡그린 얼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어... 슬프지만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명료하고 지적인 것, 바로 그런 초상화가 그려져야 해...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 현대적인 초상화가 있는데, 어쩌면 백 년 후에도 갈망 어린 눈으로 되돌아볼 수 있을지도 몰라[10]

가셰 박사의 초상화는 반 고흐가 스스로 총을 쏘아 사망하기 불과 6주 전에 완성되었다.[11]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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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자화상》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

반 고흐는 가셰가 빨간 테이블에 오른쪽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손에 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테이블 위에는 노란색 책 두 권과 보라색 약초인 디기탈리스가 놓여 있다. 그림 속의 디기탈리스는 심장 질환 치료에 사용되는 디기탈리스를 추출하는 식물로, 의사로서의 가셰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6]

반 고흐가 폴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시대의 비통한 표정"을 담고 있다고 쓴 박사의 "섬세한 얼굴"을, 로버트 월리스는 이 초상화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12] 월리스는 더 밝은 파란색으로 칠해진 언덕을 배경으로, 가셰의 울트라마린 블루 코트가 "인간의 동정과 우울을 반영하는, 지치고 창백한 얼굴과 투명한 푸른 눈"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12] 반 고흐 자신도 이 우울한 표정이 "캔버스를 보는 많은 이들에게 찡그린 표정으로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10]

반 고흐는《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통해 "현대적인 초상화"를 만들고자 했으며, 그는 여동생에게 이것이 "나의 다른 모든 직업적인 일들보다 훨씬, 훨씬 더 나를 열광시킨다"라고 쓴 편지에서 드러난다.[5] 이 인용구에 대해 반 고흐 학자 얀 훌스커는 "... 훨씬 후대의 세대들은 이 작품을 심리적으로 놀라울 뿐만 아니라 매우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초상화로 인식한다"라고 언급했다.[13] 반 고흐는 또한 "나의 자화상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그려졌지만, 파란색은 남프랑스의 고운 파란색이고 옷은 밝은 연보라색이다"라고 썼는데,[5] 이는 전년도 9월에 그린 그의 마지막 자화상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3]

반 고흐는 또한 1888년 아를에서 처음 그렸고 1890년 2월 생레미 병원에 있을 때 다시 그린 5점의 지누 부인의 초상화에 관해 빌레미나에게 편지를 썼다. 이 초상화는 고갱이 그린 같은 인물의 소묘를 보고 그린 것으로, 반 고흐는 그중 한 점을 오베르의 집으로 가져 갔고, 그해 초에 그렸던 이 초상화를 보고 가셰가 열광했다고 묘사했다.[13] 반 고흐는 이후 이 초상화의 구성 요소들을 가셰 박사의 초상화로 가져왔는데, 여기에는 책상에 두 권의 책이 놓인 점과 한 손에 머리를 괴고 있는 인물의 자세가 포함된다.[13]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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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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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테오 반 고흐의 부인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가 300프랑에 처음 판매한 후, 파울 카시러(1904), 케슬러(1904), 드뤼에(1910)가 차례로 구매하였다. 191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슈테델 미술관이 이 그림을 인수하여 1933년까지 전시했으나, 이후 그림은 숨겨진 방에 보관되었다. 제국 국민계몽선전부는 독일에서 소위 퇴폐예술을 제거한다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1937년 이 작품을 압수했다.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대리인 제프 앙거러를 통해 파리의 프란츠 쾨니히스에게 이 그림을 폴 세잔의 《비베뮈스의 채석장》, 그리고 반 고흐의 또 다른 작품인 《도비니의 정원》과 함께 판매했다.[14] 1939년 8월, 쾨니히스는 그림들을 파리에서 뉴욕의 크노들러 갤러리로 옮겼다. 지그프리드 크라마르스키는 1939년 11월 리스본으로 탈출하여 1940년 1월 뉴욕에 도착했다. 그림들은 크라마르스키의 관리에 맡겨졌으며, 그곳에서 작품은 종종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대여되었다.[15]

크라마르스키 가족은 1990년 5월 15일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 이 그림을 내놓았고,[16] 다이쇼와 제지 명예 회장인 사이토 료에이가 8,250만 달러(7,500만 달러와 10% 수수료 포함. 현재 가치로 약 2억 달러)에 낙찰받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유명해졌다.[15] 이틀 후 사이토는 소더비스에서 르누아르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거의 비슷한 가격인 7,810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사이토 료에이는 자신이 죽으면 소장품인 이 그림과 함께 고흐르누아르의 그림 등을 함께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후 전 세계 미술계의 반대로 1991년 5월 14일 발언을 취소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이토 회장은 이날 성명에서 "중국에는 진시황의 점토 병마와 명 13능이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반 고흐와 르누아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다시 말해 단지 그 작품들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소원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하였다.[17] 사이토 료에이는 도쿄의 밀폐 보관실에 그림을 보관하였다.[18] 나중에 그는 그림을 일본 정부나 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말했지만, 1996년 그가 사망한 이후 초상화의 정확한 위치와 소유권에 대해서는 공개된 정보가 없다.[19] 2007년 보도에 따르면, 이 그림은 10년 전에 오스트리아 태생의 투자 펀드 매니저인 볼프강 플뢰틀에게 팔렸다고 한다.[20] 이후, 플뢰틀은 재정적 위기로 인해 그림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당사자들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20] 슈테델 미술관은 2019년 전시회에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사설 탐정을 고용해 소재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찾지 못했고, 대신 미술관이 여전히 소유하고 있던 원래의 액자만 빈 채로 전시하였다.[21]

두 번째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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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를 문 가셰 박사의 초상》, 1890년 5월
에칭, 18 cm × 15 cm
(반 고흐의 유일한 에칭)

이 초상화의 두 번째 버전은 가셰 본인이 소유하였다. 1950년대 초,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후기 인상주의 회화 소장품들과 함께 이 작품을 프랑스 공화국에 기증했다.[22][23]

두 번째 버전의 진위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1890년 6월 3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초상화 작업에 대해 언급하며 "...노란색 책과 보라색 꽃이 핀 디기탈리스 식물"를 포함시켰다고 썼다.[24] 이후 빌레미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노란 소설책과 디기탈리스 꽃"을 언급했다.[5] 두 번째 버전의 그림에는 노란 소설책이 없기 때문에, 편지는 분명히 원본 버전만을 언급하고 있다.

가셰 박사와 그의 아들 폴 또한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들은 독창적인 작품을 그리기도 했지만, 가셰의 소장품에 있는 후기 인상주의 회화들을 종종 복제했는데, 여기에는 반 고흐뿐만 아니라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의 작품도 포함된다. 이 모사본들은 스스로 제작했다고 밝혔고, 폴과 루이 반 리셀이라는 가명으로 서명했지만, 이러한 관행은 박사의 초상화를 포함하여 가셰 소장품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25] 게다가 일부 비평가들은 반 고흐가 오베르에 머무는 동안 70일 동안 약 80점이라는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가 직접 다 그렸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22]

이러한 의혹에 대응하기 위해, 가셰 초상화의 두 번째 버전을 포함한 그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은, 1999년에 가셰 박사의 예전 소장품 전시회를 열었다.[22] 반 고흐와 다른 후기 인상주의 거장들의 그림 외에도 전시회에는 가셰 부자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었다.[26] 전시회에 앞서 박물관은 비교를 위해 반 고흐, 세잔, 가셰 가족의 작품 각각 8점에 대해 적외선, 자외선화학 분석을 의뢰했다. 연구 결과 반 고흐의 그림에 사용된 안료는 가셰의 복사본과는 다르게 변색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6] 또한 가셰의 그림은 윤곽선을 그리고 물감으로 채운 반면, 반 고흐와 세잔의 작품은 캔버스에 직접 그려졌다는 사실도 드러났다.[25] 반 고흐는 또한 《오베르의 교회》(한번도 진위가 의심받은 적이 없음)를 제외하고 오베르에서 제작한 모든 그림에 동일한 거친 캔버스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22] 이러한 과학적 증거 외에도 옹호자들은 가셰 박사 초상화의 두 번째 버전이 아를에서 그린 반 고흐의 많은 작품보다 질이 떨어지는 점이 있기는 해도, 가셰 부자가 그린 그 어떤 그림보다도 기술적으로 뛰어나다고 주장한다.[25][26]

1928년 반 고흐 작품의 첫 번째 포괄적인 목록을 작성한 네덜란드 학자 J. B. 드 라 파일은 그의 원고에서 "우리는 이 그림이 이전 작품의 매우 약한 복제본이며, 원본의 날카로운 눈빛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했다. 파일의 저서 1970년 사후 다음 판 편집자들은 그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으며 두 작품 모두 품질이 뛰어나다고 언급하였다.[27]

에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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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셰를 통해 에칭(식각)을 접하게 된 반 고흐는, 1890년에 《가셰 박사의 초상》의 에칭을 제작했다. 가셰와 반 고흐는 남프랑스 테마의 연작을 구상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판화는 반 고흐가 만든 유일한 에칭으로, 《파이프를 든 남자》(L'homme à la pipe)로도 알려져 있다. 이 에칭의 인쇄본을 받은 반 고흐의 동생 테오는 이를 "진정한 화가의 에칭이다. 기교에 있어 정교함은 없지만 금속 위의 소묘와 같다"라고 말했다. 판화는 오르세 미술관이 소유한 반 고흐의 가셰 박사 초상화와는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캐나다 국립미술관은 "선의 구불구불한 흐름은 반 고흐 후기 양식의 표현력 있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라고 평가한다. 캐나다 국립미술관이 소유한 인쇄본은 반 고흐 사후, 가셰 박사의 아들 폴 가셰 주니어가 인쇄한 60점 중 하나다. 인쇄물의 하단 가장자리에는 가셰의 수집가 인장이 찍혀 있다.[2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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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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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2 빈센트 반 고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18년 9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9월 13일에 확인함.
  2. 1 2 Brettell, Richard R.; Hayes Tucker, Paul; Henderson Lee, Natalie (2009). 19세기와 20세기 회화. Metropolitan Museum of Art. 126쪽. ISBN 9781588393494. 2018년 9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9월 14일에 확인함.
  3. Ravin, James; Amalric, Pierre (1997). 폴 페르디낭 가셰의 미출간 원고 《유럽 군대의 안염》. Documenta Ophthalmologica 93. 49–59쪽. doi:10.1007/bf02569046. PMID 9476604. S2CID 20217116.
  4. Letter 648 보관됨 2011-07-19 - 웨이백 머신
  5. 1 2 3 4 편지 W22 보관됨 2011-08-11 - 웨이백 머신
  6. 1 2 Henley, Jon (1999년 1월 27일). 뛰어난 가셰 박사. 가디언. 2018년 9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9월 14일에 확인함.
  7. 가셰 박사. 오르세 미술관. 2018년 9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9월 14일에 확인함.
  8. 편지 564 보관됨 2006-09-25 - 웨이백 머신
  9. 편지 531 보관됨 2016-07-09 - 웨이백 머신
  10. 1 2 편지 W23 보관됨 2011-02-27 - 웨이백 머신
  11. Tully, Judd (1990년 5월 16일). 반 고흐 작품, 8250만 달러에 낙찰. 워싱턴 포스트. 2025년 1월 11일에 확인함.
  12. 1 2 Wallace, Robert (1969). 반 고흐의 세계. New York: Time-Life Books. 174–75쪽.
  13. 1 2 3 4 Hulsker, Jan (1990). 빈센트와 테오 반 고흐: 두 사람의 전기. Ann Arbor, MI: Fuller Publications. 420–21쪽. ISBN 0-940537-05-2.
  14. Lindsay, Ivan. (2014). 약탈과 도난 예술품의 역사: 고대부터 현대까지. London: Andrews UK. 413쪽. ISBN 978-1-906509-56-9. 2017년 4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0월 31일에 확인함.
  15. 1 2 Kleiner, Carolyn (2000년 7월 24일). 반 고흐의 실종 사건. Mysteries of History (U.S. News & World Report). 2013년 12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7일에 확인함.
  16. Christie's New York May 15, 1990, 인상주의 및 현대 회화와 조각 작품 21번 (Part 1). Sale GACHET-7068.
  17. "명화와 함께 화장" 유언 세계 미술계 분노로 취소. 경향신문(AFP). 1991년 5월 16일.
  18. [삼성 사태 쟁점] 주인을 잘못 만난 ‘행복한 눈물’. 한겨레21. 2008년 2월 5일. 2013년 12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4월 13일에 확인함.
  19. 가셰 박사 초상화의 역사. Annaboch.com. 1990년 5월 15일. 2010년 12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15일에 확인함.
  20. 1 2 "가셰 박사" 목격담: 바로 플뢰틀이었다! 보관됨 2018-05-04 - 웨이백 머신, ArtsJournal
  21. Bailey, Martin (2019년 11월 15일). 가셰 박사의 초상화는 어디에 있는가? 반 고흐의 가장 값비싼 그림의 불가사의한 실종. www.theartnewspaper.com. 2020년 7월 6일에 확인함.
  22. 1 2 3 4 Bailey, Martin (March 1999). 세잔, 반 고흐와 함께 면밀한 검토 대상에 오르다. The Art Newspaper. 10–12쪽. 2011년 9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5일에 확인함.
  23. Kimmelman, Michael (1999년 5월 29일). 가짜와 진짜를 비교하기. Art Review (The New York Times). 2015년 5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5일에 확인함.
  24. Letter 638 보관됨 2011-01-12 - 웨이백 머신
  25. 1 2 3 Lichfield, John (1999년 2월 5일). 예술: 가셰에는 명성이 없다. The Independent. 2010년 4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6일에 확인함.
  26. 1 2 3 Henley, Jon (1999년 1월 28일). 뛰어난 가셰 박사. The Guardian. 2014년 5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7일에 확인함.
  27. de la Faille, J.B.; Reynal & Company (1970).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 New York: William Morrow & Company. 292쪽.
  28. 가셰 박사의 초상. Collections.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2011. 2011년 9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21일에 확인함.

더 읽어보기

[편집]
  • Forsythe, Michael; Bowley, Graham; Povoledo, Elisabetta (2024년 12월 17일). The Search for van Gogh's Lost Masterpiece (미국 영어). The New York Times. 2025년 2월 27일에 확인함. 
  • Saltzman, Cynthia: Portrait of Dr. Gachet: The Story of a Van Gogh Masterpiece: Money, Politics, Collectors, Greed, and Loss. ISBN 0-670-86223-1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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