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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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콘스탄티누폴리스[*], 라틴어: Constantinopolis 콘스탄티노폴리스[*], 영어: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는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의 옛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꾸기 전의 원명은 비잔티움(라틴어: Byzantium 비잔티움[*], 그리스어: Bυζαντιον 뷔잔티온, 비잔티온[*])이었다.

역사

그리스 메가라 출신 비자스(Byzas)가 창건했다고 하며, 최소한 기원전 600년경에는 작은 촌락들이 발달했다. 초기 비잔티움이란 이름은, 비자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동방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로마 제국을 놓고 내전을 벌였을 때 비잔티움은 니게르 편에 서서 세베루스군에 저항했다. 당시 비잔티움에는 천험의 지형과 다수한 함대와 프리스쿠스라는 이름의 기술자가 고안한 각종 기계 장치, 군사와 백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려 3년간이나 농성했으므로 도시가 함락되고서 세베루스 황제의 보복 조치로 페린투스(Perinthus)시의 일부로 격하된 후 세베루스 황제에 의거해 메세 가도가 놓였다.

비잔티움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임 이후 내전에서 처음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황제에게 지배받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만나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는 사이에 리키니우스의 영역으로 쳐들어갔으나 도리어 신속하게 돌아온 리키니우스에게 반격당해 죽은 때 리키니우스는 11일간 포위 공격해 비잔티움을 점령했다.

내전이 종결되어는 가운데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게 되었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을 완벽히 통일하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맹공받았는데 처음에는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2일간 전투 끝에 배 130척고 병사 5천 명을 수장시킨 탓에 전세가 급격히 반전됐다. 바다의 장악으로 보급을 원활히 받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결국 장악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 결과 선정된 도시가 비잔티움이었다. 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으로써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 있는 군사상 요충지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으며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았다. 당시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침내 324년에서 330년에 걸친 규모가 막대한 공사가 끝나고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명으로 불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한 "새로운 로마(Nova Roma)"가 공식 명칭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이거나 애칭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 황제들이 외면했던 로마시에서 완벽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330년 5월 11일 월요일 이 도시명을 "새로운 로마(Nova Roma)" 로 부르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한 이래, 이슬람화 이전까지 기독교(동방정교회)문화의 꽃이 피어서 지금도 정교회 성 소피아 성당에는 화려한 성화(이콘)들이 남아 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는데 이슬람불가르족을 위시해 제 이민족에게 침입 받았으나 천혜의 자연 조건으로 난공불락인 이 도시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으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침공 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라틴인들에게 함락되었다가 57년 만인 1261년 미카엘 8세에 의거해 탈환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에 함락됐지만, 그것은 율리우스력이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6월 7일에 함락됐다. 당시 오스만제국의 군주 메메드2세는 13만 이상 육군과 해군과 우르반의 거포란 신무기를 동원해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했지만, 로마군은 외국 용병과 일반 시민 중 무기를 들 수 있는 사람까지 총 7천여 명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의 힘으로 로마군은 심신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해 버티었고 약 50여 일간 압도하는 병력과 식량과 무기 차이를 극복하고 항전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참조) 이 도시를 함락시킨 술탄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오스만투르크 치하에서는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터키어 이름인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되었으나 서구에선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스탄불은 1930년에 와서야 도시 공식 명칭이 되었다. 제일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가 이 도시의 연고권을 주장하면서 강제 접수하려 했으나 후에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무스타파 케말(케말 아타튀르크)이 방어하여 저지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 폴리(i Poli, "도시")라 불렀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존속했던 기간 대부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럽 최대 도시였고 제국인들이 세계 중심이었기 때문이며, 콘스탄티노플은, 당대 유럽 최고 학문과 청결을 자랑하는 도시였고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이라 불리는 도시로 상업이 발전하고 전성기 때는 교외까지 약 100만 이상 인구가 거주했다. 11세기 도시를 방문한 프랑스 순례자는, 유럽에서 최대 도시 10개를 합쳐도 이 도시만큼 되지 않는다고 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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