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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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大奥, おおおく)는 에도 성 혼마루 구역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처첩,생모,자녀 및 그를 따르는 시녀들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 말로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혈족(오와리家, 기슈家)의 내전에도 같은 호칭을 사용하였다. 본항목에서는 에도 성의 오오쿠만을 언급한다.

에도 성니시노마루(西の丸)나 니노마루(二の丸)에도 오오쿠와 비슷한 구역이 있어 비상시에는 오오쿠의 기능을 수행했다. 쇼군과 그의 미성년 아들, 주치의를 제외한 남성의 출입은 기본적으로 금지시켰다. 시녀의 수는 최전성기에는 1000명에서 3000명 사이로 전 세계 어느 궁정에도 지지 않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부터 에도성에 「오오쿠」라는 구역은 존재했지만, 당시는 「오모테(表)」와「내부」―즉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없었고, 정실부인이나 시녀 등이 바깥구역에 출입하거나 가신이 저택 내부를 방문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다음을 이은 3대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 와서 이에미쓰의 유모로 권력을 잡은 가스가노 쓰보네가, 겐나4년(1618년) 오오쿠 제도를 규정하고 이를 정비,통괄하게 되었다.

千代田之大奥 歌合 橋本(揚州)周延画

구조

에도 성의 혼마루는 크게 막부의 정청에 해당되는 「오모테(表)」, 장군이 집무를 행하며 평상시 생활하는 공간인 「나카오쿠(中奥)」, 장군의 처첩과 시녀가 있는 「오오쿠」의 3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것을 본받아 막부 이외의 무가에서 오오쿠에 해당하는 공간을 「오쿠무키(奧向き)」또는 「오쿠」라고 불렀다.)

에도 성의 혼마루에서 오모테와 나카오쿠가 한 건물이었던 것에 반해 오오쿠는 주변에 구리를 칠한 담을 쌓아 별도 건물로 분리시켰고, 「오스즈로카(御鈴廊下 : 방울복도)」라는 복도가 오오쿠와 나카오쿠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것은 쇼군이 오오쿠에 들어올 때에 방울이 달린 끈을 당겨서 낸 소리로 신호를 보내 「오죠구치(御錠口:출입구)」를 열었던 연유로 그러한 이름이 된 것이다. 그 외에 화재 같은 긴급사태를 생각해 「시모오스즈로카(下御鈴廊下)」라는 것도 만들게 되었다.

오오쿠는 크게 히로시키(広敷)나가쓰보네(長局)고쇼(御殿)으로 나뉜다. 히로시키는 오오쿠의 사무 및 경비 등을 담당하는 남자 관리의 거처와 맞닿아 있었다. 오오쿠에서 유일하게 남성이 들어올 수 있던 곳이지만 나가쓰보네와 고쇼에는 들어갈 수 없기에 히로시키와 다른 부분 사이에 출입구를 두었다. 그 중에서도 나가쓰보네의 출입구는 七ツ口라고 했다. 시녀들의 내방객 출입이나 상인들에게 물건을 살 때 이용된 것으로 七ツ時(오후4시)에 닫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고쇼는 쇼군의 침소와 정실의 거처, 측실이나 쇼군후계자 외의 자녀 거처 등을 일컫는다. 나가쓰보네는 시녀들이 머무는 곳으로 시녀의 지위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거처가 배분되었다.

오오쿠의 구성원

장군의 처첩과 생모

오오쿠의 명목상 여주인은 쇼군 정실인 미다이도코로이다. 그러나 미다이도코로가 실권을 잡은 예는 많지 않고, 역대 쇼군 정실 중에서도 생전에 관직을 받은 이는 4명에 불과하며 [1] 자신의 아들이 쇼군이 된 이는 2대 쇼군 정실인 오에요 뿐이다. 그 때문에 대체로 오토시요리(年寄;상급 시녀)나 후계자를 낳은 측실, 쇼군의 생모가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쇼군의 정실은 관례상 천황가,친왕가공가(섭관가)에서 맞이하였다. 무가 출신의 정실을 맞이할 때도 우선 구게의 양녀로 간 후 출가하는 것이 관례였다. 정실부인의 거처는 「新御殿御上段・御下段」과「御休息」을 거실, 「御切形の間」을 침실로 사용했다. 만약 남편인 쇼군이 죽으면 삭발 후 승려가 되어 니시노마루로 거처를 옮기고 쇼군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

쇼군의 측실은 기본적으로 쇼군을 시중드는 시녀 중에서 선택되었다. 쇼군이 맘에 드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오토시요리에게 알리면, 그날 저녁에 준비를 시켜 쇼군의 침소에 대기시켰다. 만약 미다이를 모시던 이가 쇼군의 눈에 들었을 때는 정실을 시중드는 우두머리가 쇼군 시녀의 우두머리와 협의하여 침실에 들기도 했다고 한다. 쇼군과 잠자리를 같이한 시녀는 「오테츠키(お手つき)」이라고 불리며 회임하면 「오하라사마(お腹様)」라는 이름을 얻고 정식으로 측실이 된다. 그 후, 자신이 낳은 아이가 쇼군의 후계자가 되면 그 아이가 쇼군이 되는 것과 동시에 쇼군 생모로 불리게 되어 커다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단, 측실이나 장군 생모가 오오쿠에서 받는 대우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서, 쇼군의 후계자를 낳았다고 반드시 권력을 쥘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물게 출산후나 삭발출가 후 오토시요리의 윗전으로 대우받은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 만큼의 급여를 받는다는 것이지 오토시요리의 권한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모시던 쇼군의 사망 후 출가한 측실은 니노마루 등에서 여생을 보냈다.

오오쿠의 시녀(女中)

오오쿠의 여성 중 대부분은 오죠츄(お女中)라 불리는 시녀였다. 오죠츄는 막부에서 급여를 받는 시녀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쇼군의 딸이 시집가거나 쇼군의 아들이 양자로 보내진 다이묘 가문에도 오죠츄가 있었다. 오죠츄는 크게 쇼군 소속과 미다이도코로 소속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직함은 대부분 같다. 단, 서열이나 권한은 쇼군 소속의 시녀가 더 높았다. 직무나 서열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에도시대 후기 오츄로의 직무는 아래와 같았다.

오죠츄의 명칭 및 직무
계급 읽는 법 주된 직무
上臈御年寄 죠로오토시요리 쇼군 및 미다이도코로의 관련업무 및 상담을 맡음. 미다이가 쿄토에서 데리고 온 구게(문신귀족) 출신의 여성이 많다.
小上臈 고죠로 죠로오토시요리 직책의 후보역 또는 견습.
御年寄 오토시요리 로조(老女)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오쿠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최고 권력자.「오모테」의 로주에 대응된다..
御客応答 오캬쿠아시라이 외부인사가 오오쿠를 방문할 때 접대를 담당한다.
中年奇 츄도시요리 오토시요리의 지시에 따르는 대리역. 식사메뉴의 체크로부터 독 검사까지의 일을 했다.
中臈 츄로 쇼군과 미다이도코로의 신변을 보살펴주는 사람. 양가의 규수나 기량이 우수한 여성이 선택되어 이 중에서 측실이 나왔다.
御小姓 오코쇼 미다이도코로의 시동. 7세~16세정도의 소녀인 경우가 많았다.
御錠口 오죠구치 오오쿠와 나카오쿠의 출입구를 관리했다.
表使 오모테즈카이 바깥일 담당. 오토시요리의 지시로 물자 조달을 히로시키의 관리에게 요청했다.
御右筆 고유히츠 일기부터 서신에 이르는 모든 공문서 관리 담당. 여러 다미묘로부터의 헌상품의 검사도 맡았다.
御次 오츠키 식사와 여러가지 도구를 운반하거나 대면소의 청소 등을 담당.
切手書 킷테가키 七ツ口(나가츠보네와 히로시키 출입문)를 지나서 오는 외부의 내방자가 지녀야 하는 통행증을 발행하는 직무.
呉服之間 고후쿠노마 장군과 미다이도코로의 의상 담당
御坊主 오보즈 쇼군의 잡무 담당. 삭발을 하고 승복을 걸치고 있다. 중노년의 여성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아, 경우에 따라 나카오쿠에 출입하기도 했다.
御広座敷 오히로자시키 오모테 쪽의 허드레일. 오오쿠를 방문한 여자 심부름꾼의 식사를 담당했다.
御三之間 오산노마 3지간 이상의 거실 청소 등을 한다.
御仲居 오나카이 부엌에서 취사를 담당.
火之番 히노반 주야간으로 오오쿠의 화재를 감시한다. 무예에 뛰어난 이를 뽑아 경비원의 역할도 담당했다.
御茶之間 오챠노마 미다이도코로의 차(茶) 시중을 드는 역
御使番 오츠카이반 히로시키와 교쇼 간의 출입구를 관리한다.
御半下 오하시타 오오쿠의 모든 잡무를 맡는 하녀.

오오쿠의 시녀 중에서 죠로오토시요리부터 오보즈까지가 오메미에(對面以上)라고 하여 쇼군과 미다이도코로를 알현하는 것이 허락되었던 상급의 시녀들이다. 시녀들의 녹봉 (수당)은 주로 절미, 합력금, 녹미(매달의 식료), 탕지목(목욕탕용의 신), 오색은(된장이나 소금을 사기 위한 은), 기름등의 현물이 많았다. 또 오토시요리 등 상급 시녀가 되면 마치야시키가 주어졌다고 한다. 오죠츄는 되도록 무가 출신의 여성이 고용되었다. 평민 출신이 봉공에 오르는 경우, 선배 시녀의 중재를 받아 사무라이의 양녀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오오쿠의 최후

1868년 4월, 에도 막부는 메이지 정부군에게 에도 성을 넘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의 오토시요리인 다키야마는 시녀들의 연공에 따라 배령물을 주어 오오쿠를 떠나게 했다. 오오쿠에 남아있던 혼슈인(13대 쇼군 생모)과 덴쇼인(13대 쇼군 정실)은 히토쓰바시家의 저택에,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은 니시노마루에 있던 짓세인(14대 쇼군 생모)과 함께 다야스家 저택으로 옮겨 성의 양도에 대비했다. 4월 11일(5월 3일) 800명의 정부군이 에도 성에 들어오면서 오오쿠 제도도 폐지되었다. 다만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실부인 이치조 미카코는 오오쿠에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입회하지 않았다.

오오쿠의 유명한 여성

관련 항목

주석

  1. (6대 쇼군 정실 고노에 히로코, 10대 쇼군 정실 노리코 황녀(五十宮倫子女王), 11대 쇼군 정실 고노에 타다코 ,13대 쇼군 정실 고노에 도쿠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