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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耿君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3월 4일 (수) 23:15 판

김문(金汶, ? ~ 1448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언양이며, 자는 윤보(潤甫)이다. 벼슬은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생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가 무당 노릇을 하여 감악사(紺嶽祠)에서 먹고 지냈다'고 하였다.[1]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하여, 142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후 집현전 수찬이 되었고, 1435년 주부(注簿)에 임명되었다.[2] 집현전 부교리에 임명된 뒤, 세종의 명으로 이계전과 함께 《자치통감》《자치통감강목》의 훈의(訓義)를 찬술하였다.[3] 김문은 훈민정음의 제작에 대하여 처음에는 긍정적인 입장을 피력했으나, 1444년 당시 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올린 상소에 이름을 올린 그는 제작의 불가함을 주장하는 편에 섰다. 이에 최만리 등과 함께 의금부에 보내졌다가 석방되었다.[4] 다만, 김문은 제작 가능에서 불가로 말을 바꾼 것에 대한 처벌을 받았다.[5] 그 후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되었고,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하여 1445년 완성하였다.[6] 1448년, 세종의 명으로 사서(四書)를 번역하여 그 공으로 승급하여 발탁이 예상되었으나 중풍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1]

성격

김문은 침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다고 한다. 그는 경서(經書)와 자사(子史)에 능통하고 박학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누군가 뜻이 의심가는 것이나 고전의 전거를 물으면 즉시 옳은 답을 하여 모두 탄복하고 세종도 그를 중히 여겼다. 하지만 저술을 잘 하지 못해 동료의 글을 빌려 썼다고 한다. 사람과 사귐에 있어 속을 알 수 없고, 밖으로는 청렴하고 조용하나 안으로는 욕심이 많았으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미워했다고 한다. 정인지가 김문에게 '학문이란 심술(心術)을 바르게 함을 귀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자, 김문은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제자인 매좌(梅佐)를 데리고 뜰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밤새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1]

주석

  1. 《세종실록》권119, 세종 30년(1448) 3월 13일조
  2. 《세종실록》권67, 세종 17년(1435) 3월 21일조
  3. 《세종실록》권74, 세종 18년(1436) 7월 29일조
  4. 《세종실록》권103, 세종 26년(1444) 2월 20일조
  5. 《세종실록》권103, 세종 26년(1444) 2월 21일조
  6. 《세종실록》권110, 세종 27년(1445) 10월 27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