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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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 왕후

고준 왕후(향순왕후, 일본어: 香淳皇后 고준코고[*], 향순왕후, 1903년 3월 6일 ~ 2000년 6월 16일)는 쇼와 일왕의 왕후이다. 본명은 구니노미야 나가코(久邇宮良子)이며, 상징은 복숭아이다. 방계 왕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 邦彦) 왕, 어머니는 12대 사쓰마(薩摩) 번주의 공작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의 7녀 지카코(俔子)이다.

어린 시절

1903년(메이지 36년) 3월 6일 구니노미야 가의 3남 3녀 중 셋째로 출생하였고 1907년(메이지 40년) 9월 2일 가쿠슈인 여학부 유치원에 입원하였다. 당시에는 유치원에서부터 왕족은 따로 별실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때 두 여동생 외에도 미치노미야 히로히토(후의 쇼와 일왕), 아쓰노미야 야스히토(후의 지치부노미야)와 함께 만나 식사를 하곤 했다고 한다.

같은 학교 초등학과를 거치고 1915년(다이쇼 4년)에는 가쿠슈인 여학부 중학과 진학. 재학 중인 1918년(다이쇼 7년) 1월 14일에 왕태자비로 내정되었다. 내정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녀의 성격이나 소질 이외에도 메이지 일왕이 왕족 중 가장 가난한 편이었던 구니노미야 집안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고 한다. 내정됨과 동시에 가쿠슈인을 그만두고 같은 해 4월 13일부터 구니노미야가 내에 설치된 학문소에서 왕후 교육을 받았다. 학문소는 "꽃 저택(お花御殿)"으로 불리며 두 여동생과 그 외 친한 학우들이 가쿠슈인의 수업을 끝낸 후에 방문하며 함께 교육을 받는 곳이 되었다. 학문소의 건물은 그 후 도쿄도립 고마바 고등학교에 하사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 5월 7일에 왕태자 히로히토가 원복례를 실시한 뒤 같은 해 6월 10일에 정식으로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1년(다이쇼 10년)에 이르러 모계인 시마즈가에 색맹의 유전이 있었던 탓에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나가코가 왕태자비로서 부적당함을 들어 구니노미야 가에 파혼을 강요한 이른바 "궁중모중대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내용은 극비로 취급되었지만 세간에는 다양한 억측이 퍼졌는데, 그 중에서도 궁중 내에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야마가타의 책략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강했기 때문에 나가코에게 동정이 모이기도 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다음 해 2월 10일, 궁내성이 약혼 결정에 번복이 없음을 명백하게 밝힘으로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일왕인 다이쇼"과학에도 틀리는 것이 있는 줄 안다" 라고 말한 것이었다고 한다.

학문소에서의 교육은 실제로 2, 3년 정도가 예상되었었으나 궁중모중대사건과 그에 이은 관동대지진 사건 등으로 결혼식이 계속 연기되면서 길게 이어졌다.

생애

1975년 쇼와 일왕(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에서 포드 대통령(맨 오른쪽)이 주최하는 환영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만찬회장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맨 왼쪽이 고준 왕후.

1922년(다이쇼 11년) 6월 20일, 결혼에 대해 다이쇼 일왕의 칙허가 내려져 9월 18일에 납채, 같은 때에 훈 일등 호우칸쇼 훈장을 받았다. 실제로 다음 1923년(다이쇼 12년)중에도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본 히로히토가 스스로 연기했다고 한다.

1924년(다이쇼 13년) 1월 26일에 마침내 결혼, 왕태자비가 되었다. 남편인 히로히토 왕태자와의 관계는 원만해서 항상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고 한다. 1925년(다이쇼 14년) 12월 6일에 첫 왕녀인 데루노미야 시게코(泰宮成子) 내친왕이 탄생한다. 나가코는 유모를 두긴 했지만 가능한 한 스스로의 모유로 딸을 길렀는데, 당시만 해도 왕실에서 유년기의 자녀를 수중에서 기르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26년(쇼와 원년) 12월 25일, 쇼와 일왕의 즉위와 함께 황후가 되었다. 이후 계속 자녀를 낳았으나 내친왕만이 태어나면서 다이쇼 일왕 이후 폐지되었던 측실 제도의 부활이 심각하게 검토되었다. 그러나 쇼와 일왕에 의해 거부된 이 안은 1933년 장남 쓰구노미야 아키히토(継宮明仁)의 탄생으로 다시 수그러졌다.

전후 예전과 달리 왕실의 역할이 국민들과 가깝고 열린 황실로 변화하면서, 일왕 왕후 동반의 공무가 일반적이 되자 일왕과 함께 각종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1947년(쇼와 22년)의 일본 적십자사 명예 총재 취임을 시작으로, 1952년(쇼와 27년) 이후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1964년(쇼와 39년)의 도쿄 올림픽 개회식, 1970년(쇼와 45년)의 일본 만국 박람회 개회식, 1972년(쇼와 47년)의 삿포로 동계 올림픽 개회식 및 오키나와 복귀 기념식전 등의 출석은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왕녀들의 결혼에 대해서도 열린 시각을 고수하여 장녀 시게코 내친왕을 위시해 당사자들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한 맞선이나 데이트를 진행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아키히토 왕태자와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와의 약혼이 결정되었을 때에는 지치부노미야 친왕비 세쓰코 및 다카마쓰노미야 친왕비 기쿠코, 나시모토노미야 왕비 이쓰코(이방자 여사의 어머니), 마쓰다이라 노부코 등과 함께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후 마쓰다이라 노부코가 미야자키 등과 미리 짜놓고 결혼에 반대하는 우익 단체와 연락을 했다고 기록되고 있어 이 문제는 후에까지 꼬리를 잇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미치코에게 반감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1975년의 방미 당시 공항에서 인사하는 미치코를 무시하는 영상이 남아 있다.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