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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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준(韓文俊, 1118년 ~ 1190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대흥(大興)[1]이다.

생애[편집]

어려서부터 글짓기에 능했으며, 인종(仁宗)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재주와 명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장주(長州)[2]·장흥(長興)·남원(南原) 세 고을의 부사(副使)와 남경부유수(南京副留守)를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백성에게 두루 혜택을 주는 행정을 펼쳤는데, 문인(門人) 오세재(吳世材)가 일찍이 “남녘에서는 세 군(郡)의 풍속을 되살렸고, 동쪽에서는 한 주(州)의 백성을 어루만졌네”라는 시를 지어 보내니, 사람들이 사실 그대로를 옮겨 놓은 시라고 평하였다.[3]

1175년(명종 5) 대부경(大府卿)으로서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진간공(秦幹公) 등 34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3], 이후 우승선(右承宣)으로 발탁되었다가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승직되었다.

1178년(명종 8)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진광순(陳光恂)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3], 이듬해 송유인(宋有仁)과 뜻이 맞지 않아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로 좌천되었다.[4]

그러나 송유인은 같은 해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자기 장인인 정중부(鄭仲夫)와 함께 살해되었다.[5]

1180년(명종 10) 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보(太子少保), 이듬해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판예부사(判禮部事)를 차례로 역임했고, 1182년(명종 12)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다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허징(許徵) 등 34인에게 급제를 주었다.[3]

이듬해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임했다가, 1184년(명종 1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했는데, 이 때 관리들의 인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이듬해 별자리에 변고(재변)이 나타나자 임금에게 차자(箚子; 상소문)를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일흔이 되던 해에 은퇴했다.[6]

집에 있으면서 날마다 은사(隱士)나 시객(詩客)들과 더불어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1190년(명종 20) 졸하자 임금이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정의(貞懿)라는 시호를 내렸다.[4]

평가[편집]

『고려사』는 한문준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한문준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세 번이나 예위(禮闈)[7]를 주관하면서 선발한 인재 중에 이름난 선비가 많았다.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인 한유충의 묘지명에 근거했다.

  • 증조 - 한억(韓億) : 증(贈) 우복야(右僕射)·수좌사낭중(守左司郞中)·기거주(起居注)·지제고(知制誥)
    • 조부 - 한원경(韓元卿) : 검교우복야(檢校右僕射)·수호부시랑(守戶部侍郞)·어서검토관(御書檢討官)
      • 아버지 - 한유충(韓惟忠, 1080년 ~ 1146년) : 검교태위(檢校太尉)·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공부사(判工部事), 경렬공(敬烈公)
      • 어머니 - 이부상서(吏部尙書)·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지제고 김상우(金商佑)의 차녀
        • 형 - 이름 미상, 2살에 사망
        • 형 - 한문유(韓文裕)
        • 형 - 한문혜(韓文慧) : 승려, 영복사(永福寺) 주지

한문준이 등장한 작품[편집]

각주[편집]

  1. 대흥 한씨는 오늘날 인구 통계에서는 집계되지 않는 성씨이다.
  2. 지금의 함남 정평군 장원
  3. 『고려사』, 「선거지」
  4. 『고려사』, 「한문준전」
  5. 『고려사』, 「경대승전」과 「정중부전」
  6. 1187년(명종 22) 문극겸(文克謙)이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한문준은 1187년에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7. 예부시(禮部試)를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