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에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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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에시 3세(폴란드어: Kazimierz III, 1310년~1370년, 재위 1333년~1370년)는 폴란드의 군주이다.
[편집] 생애 및 업적
카지미에시 대왕은 분할대공시대를 겪으며 끔찍하게 분열되어있던 폴란드를 통일해 후기 피아스트 왕조를 연 브와디스와프 1세 키작은왕의 아들로, 그는 폴란드 역사 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그의 국가 정책면에서는 일단 볼레스와프 대공의 대공에 버금가는 천재성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국제 정치 문제에서 대단히 신중하고 능랂게 행동하였었다. 일단 블라디스와프 키작은왕 사후 폴란드는 다시 타협적인 독립 상태가 되었는데, 그는 보헤미아와 튜턴 기사단과 타협을 택하여 일단 보헤미아의 실롱스크 영유권을 인정하고, 대신 폴란드의 왕관을 포기시켰다. 그리고 포메라니아의 도이치 기사단에는 강경책을 썼다. 이어서 우크라이나의 영유권에는 1352년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와의 충돌을 물리치고 갈리치아와 볼리니아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카지에미슈는 갈리치아에 그리스 정교 수좌대주교구를 설립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이러한 자유로운 통치는 새 영토가 종교적으로 상당히 이질적인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통치하에 놓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리투아니아를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에 대해 평화적인 개종운동을 펼쳐 헝가리와 룩셈부르크까지도 협조할 정도로 능란한 외교술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중부 유럽의 외교문제에도 개입하여 뛰어난 해결 솜씨를 보여주었었는데, 그는 크라코프에서 국제 정치회의를 개최하여 보헤미아의 카렐 1세와 헝가리의 러요시 1세의 의견 차이를 해결하였다. 이어 1364년에는 크라코프 대학을 건립하였고, 그는 폴란드의 법전을 집대성하여 그의 찬란한 업적을 더욱 빛내였다. 그의 찬란한 업적은 한 나라의 운명이 더이상 전적으로 국왕의 성격에 좌우되지 않을 정도로 공고한 기반을 쌓았는데, 한편으론 왕권을 약화시키는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카지에미슈 왕은 후사가 없어서 1370년 조카인 헝가리의 라요시 대왕을 계승자로 임명하고 사망하였다. 이처럼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시대를 외국인 왕이 통치했다해도 외국이 협력한것은 그의 능력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