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스와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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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Bolesław III Krzywousty

폴란드의 공작
볼레스와프 3세의 초상화, 얀 마테이코 작.
볼레스와프 3세의 초상화, 얀 마테이코 작.
재위 1107~1138년
출생일 1086년 10월 28일
출생지 폴란드
사망일 1138년 10월 28일 (52세)
사망지 폴란드 소하체프
매장지 폴란드 푸스크 대성당
배우자 키예프의 즈비슬라바
베르그의 살로메아
자녀 즈비슬라바와의 사이에서:
유배 떠난 볼레스와프 4세
아들 1명, 딸 (유디트?) 무롬의 공주]]

살로메아와의 사이에서:
레스제크 스웨덴의 왕비 리체자
딸, 노르드마크의 마르그라비네
소피에
카스미르
게르트루다
곱슬머리 볼레스와프 4세
늙은이 미에스즈코 3세
도브로니에가, 루사티아의 마르그라비네
유디트, 브란덴부르그의 마르그라비네
산도미에르즈의 헨리
아그네스 키예프의 대공녀
공정한 카시미르 2세

부친 브와디스와프 1세
모친 보헤미아의 유디트
전임자 브와디스와프 1세
후임자 브와디스와프 2세 유배자
왕가 피아스트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폴란드어: Bolesław III Krzywousty, 1185~1138년)은 보1102년부터 폴란드의 공작이었다. 그는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멘 공작과 보헤미아 브라티슬라우스 2세의 딸인 유디트사이의 아들이다.

볼레스와프 3세는 나쿠오 전투(1109년)에서 포메라니아군을 격퇴했으며 포메라니아를 점령했다.(1119~1123년). 그리하여 폴란드의 발트해 접근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 포메라이나의 지방 정부는 그 지역을 떠났다.

볼레스와프 3세는 1109년구오고프 전투프시에 폴레(후자는 독일어로 번역하면 훈즈펠트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를 격퇴하기도 했다. 1113~1119년에 그는 포메라니아 전역을 점령했다. 1135년에 볼레스와프는 황제 로타르 3세(로타르 본 숩플린부르그)에게 공물을 바쳤으며 황제는 포메라니아 서부 지역과 봉토인 뤼겐으로 부터 공물을 받았다.

볼레스와프는 헝가리에서도 작전을 펼쳤지만,(1132~1135년) 작은 성과만 거뒀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키예프의 스비아토폴크 2세의 딸 즈비슬라바였다. 그들 사이에 한 명의 아들이 있다. :

볼레스와프는 그 후에 살로메아 본 베르그-스첼크링켄과 결혼했고 그들 사이에는 14명의 자녀를 두었다.(아들 6명, 딸 8명). 다음은 그들 중 아들 네명과 딸 다섯명의 목록이다.:

볼레스와프 프리오우트가 죽기 전에 부친의 (보레스와프 3세 크르지보우스티의 유언)를 발행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영토를 네 명의 아들이 나누어 상속 받으라는 것이었다. 유언에서 성립된 "상위 법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었다. 왕조의 상속자들중 가장 손윗 사람이 나머지 지역 모두를 통치하는 최상의 권력을 지니고 더이상 분할 할 수 없는 "상급 영토"인 폴란드의 남-북에서 중부까지 이르는 크라쿠프도 포함한 방대한 영토의 통제권 또한 지닌다. 그 고위의 특권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인 포메라니아 전역의 통제권을 포함한다. "상위 법규"는 볼레스와프가 죽고 얼마 못가 휴지 조각이 되었고, 거의 200년간의 봉건 분열 기간에 접어들게 했다.

피아스트의 정복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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