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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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수밍(양수명, 梁漱溟)은 중국의 철학자, 사상가로 광시성 구이린시 출생이다. 몽고족이다.

생애[편집]

1917년 차이위안페이의 요청으로 천두슈, 리다자오 등과 함께 베이징대 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인도 철학을 강의했다. 슝스리와 교유하며 유교로 차츰 전향하였다. 1927년 칭화 대학 국학원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40년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하여 향촌 사회 건설 운동에 나섰으며, 1947년에는 민주동맹에서 탈퇴하였다. 중공 정부 성립 후, 정치협상회의 위원직에 있으면서 친분이 있던 마오쩌둥의 자문역에 있었다. 그러나 1953년 마오쩌둥저우언라이 등 중공 지도부는 무산계급 독재 투쟁을 통한 중국내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자 하였고, 동양의 전통 사상에 뿌리를 둔 그의 향촌 건설과 농민 계몽 운동의 건의에 회의를 표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반우파운동 기간에는 마오쩌둥의 보호를 받았으며, 1958년에는 대약진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문혁 기간에는 정협 위원직을 계속 맡아서 혁명의 광풍을 피하여 저술에 전념하기도 하였고 강연이나 학습회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로 정협위원, 철학자, 유학자 등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1988년 6월 23일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1928년'촌'으로 제창 한 자신의 사상 실천을 완수하기 위해 향촌 건설 운동 에 몰두하고 유교의 정신에 따른 농촌 사회 운동가, 교육자로서 산동의 고향 마을 건설의지도를 실시했다. 또한 일본의 니노미야 손 토쿠를 경애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41년에 결성된 중국 민주 정부 오케스트라 동맹에 참여하고 국공 양 진영의 중개 역을 맡아 민주 동맹의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정치 협상 회의 후 일단 은퇴 후 인민 정부의 성립 후 사천의 토지 개혁에 참여했다. 1951년,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위원으로 보선된 사상 개조의 수기를 발표했다. 마오 쩌둥 공산당 중앙이 농민의 생산 잉여를 착취하고 도시의 산업화에 투입한다는 사회주의 과도기 총 노선 정책으로 전환 한 반면 농민 이야말로 중심이라고하고 정치 협상 회의 자리에서 마오 쩌둥에 대해 자기 비판 을 요구했다. 따라서 1955년 이후 사상 비판을, 1956년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제 2 차 전체 회의에서 자기 비판 을 했다.

저서[편집]

  • "동서 문화와 철학"
  • "향촌 건설 이론"

관련 서적[편집]

  • 戴晴"마오 쩌둥과 중국 지식인 '동방 서점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