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간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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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간스케
Yamamoto Kansuke fighting a giant boar.jpg
야마모토 간스케
시대 센고쿠 시대
출생 메이오(明應) 2년(1493년)?
사망 에이로쿠(永祿) 4년 9월 10일(1561년 10월 18일)?
개명 야마모토 겐스케(山本源助), 오오바야시 겐스케(大林源助), 간스케(勘助),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 하루유키(晴幸), 도안(道安), 도키사이(道鬼齋)
별명 간스케(菅介)?, 간스케(勘介)
계명 철엄도일선정문(鐵嚴道一禪定門), 천덕원무산도귀거사(天德院武山道鬼居士)
묘소 나가노 현(長野県) 나가노 시(長野市), 아이치 현(愛知県) 도요카와 시(豊川市) 조고쿠지(長谷寺) 외
주군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씨족 야마모토 씨(山本氏), 오오바야시 씨(大林氏)
부모 아버지: 야마모토 사다유키(山本貞幸), 어머니: 오오하시 뉴도(大橋入道)의 딸
형제 요시노 사다히로(吉野貞継), 이시마쓰(石松), 미쓰유키(光幸), 하루유키(晴幸), 쓰루(鶴), 사다시게(貞重)
자녀 간조(勘蔵, 진고信供), 시타무라 안소(下村安笑, 셋째 아들)

야마모토 간스케(일본어: 山本勘助 (やまもと かんすけ))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고료군칸(甲陽軍鑑)》에서는 이름을 간스케(勘介), 휘(諱)는 하루유키(晴幸)로, 출가 후 도우키사이(道鬼斎)라고 칭했다고 하였으나, 문서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근세인 에도 시대에는 다케다 24장(將)에 포함되어, 다케다 집안의 다섯 명신의 한 사람으로도 알려졌으며 특히 다케다 신겐의 전설적인 군사(軍師)로서의 인물상이 일본의 고전 및 민간예술을 통해 일반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야마모토 간스케의 이름은 《고료군칸》 및 그 영향 아래 제작된 근세의 많은 편찬물에 등장하지만, 당대의 문서에서는 일체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아서 그 실존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최근 야마모토 간스케로 비정될 만한 '야마모토 간스케(山本菅助)'의 존재가 여러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생존 연대는 《고료군칸》에는 1493년에서 1561년이라고 하였다. 태어난 해는 묘오 9년(1500년) 또는 분키(文亀) 원년(1501년)설도 있다. 사망한 것은 서기 1561년 9월 10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에서였다.

약력[편집]

아래의 간스케의 생애에 대한 기술은 에도 시대 전기에 성립된 《고료군칸》에 기초한 것으로, 야마모토 간스케의 이름은(훗날 발견된 이치카와市河 문서를 제외하고) 《고료군칸》이외의 센고쿠 시대에서 에도 시대 전기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간스케의 생애로 알려진 것들은 전부 《고료군칸》 및 그 영향을 받은 에도 시대의 군담소설에서 비롯된 창작들로 여겨진다. 각지에 전하는 집안 전승이나 전설도 에도 시대에 들어 '다케다 신겐의 군사'로서 유명했던 간스케의 이야기로 후세에 갖다 붙여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무사시보 벤케이(武蔵坊弁慶)의 사례처럼 영웅담에 속하는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지[편집]

이마가와 가(家)의 슨푸 또는 스루가(駿河)지역 출생으로써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장애가 있었는데 왼쪽 눈이 애꾸였다.

《고료군칸》 등에 따르면 미카와 국(三河国)의 호이 군(宝飯郡) 우시쿠보(牛窪, 지금의 일본 아이치 현 도요카와 시 우시쿠보쵸牛久保町)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에도 후기에 성립된 《가이국지(甲斐国志)》에는 간스케가 스루가 국(駿河国) 후지 군(富士郡)의 야마모토(山本, 지금의 시즈오카 현静岡県 후지미야 시富士宮市 야마모토)에서 요시노 사다유키(吉野貞幸)와 안(安) 부부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미카와 국의 우시쿠보 성(牛窪城) 성주였던 마키노 씨(牧野氏)의 가신(家臣) 오오바야시 간자에몬(大林勘左衛門)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본의 NHK 대하드라마『풍림화산(風林火山)』(2007년)에서도 이 설을 채용하였다. 《가이국지》는 《고료군칸》이나 《북월군담(北越軍談)》의 기술을 인용한 것이다. 《북월군담》에는 아이치 현의 도요타 시(豊田市) 데라베(寺部)라고 하였다.

한편 일본 중세사 연구의 제1인자로 꼽히는 일본 시즈오카 대학(静岡大学) 교육학부(教育学部) 교수인 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에 따르면 이는 신빙성이 낮지만, 《우시쿠보 밀담기(牛窪密談記)》에 처음으로, 지금의 아이치 현 도요바시 시(豊橋市) 가모(賀茂)에 해당하는 미카와 국 하치나 군(八名郡) 가모노무라(加茂村)의 지명이 등장한다.

다케다 하루노부(다케다 신겐) 가신이 되기까지 호죠, 이마가와에 사관을 청하였지만 번번이 장애로 인한 생김으로 인해 사관에 실패하였고, 1536년 11월 운노구치(海ノ口) 전투에서 16살의 다케다 신겐의 책략에 패해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굴욕적인 일을 당한 후에 신겐의 모반이 있은 후에 다케다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를 이마가와에 동행하는 임무를 맡은 후 이타가키 노부가타의 천거로 인해 신겐의 가신이 되었다. 스와 요리시게를 몰아내고 시나노를 차지하는 책략을 신겐에게 헌책하고 이후 시나노 지방을 공략하는데에 많은 공을 세운다. 사나타 유키타카(사나다 유키무라의 조부)를 천거한 것도 야마모토 간스케였다고 한다.

야마모토 간스케는 다케다 신겐과 전국의 무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야마모토 간스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전사를 예측하였다. 몇년 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하였다.

제 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음력 1561년 9월 10일)에서 키즈즈키(딱따구리)전법을 세워, 군을 둘로 나누어 한 쪽은 산을 올라가 우에스기 군을 기습하고 내려오는 우에스기 군을 본대로 공격해 무너뜨리려고 하나 우에스기 군은 이를 간파하여 본대를 먼저 기습하였다. 간스케는 책략 실패의 책임을 지고 혼전 중에 돌격하여 사망한다.

병법, 축성과 천문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간스케가 만들었다는 견고한 성이 몇 개 남아있다. 또 야마모토 간스케는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에게 축성술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존이 모호하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다이묘에게 보낸 서찰에 간스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남아있는 자료들이라곤 다케다 가 내부의 자료와 후세에 의해 창작된 코요군감 뿐인데 코요군감은 역사적인 사료로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간스케가 직접 보낸 서찰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서찰에서는 간스케가 장교 정도의 위치를 지닌 인물로 나타나 신겐의 책략가이자 군법 스승으로 묘사되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다르다.

실존를 둘러싼 의혹[편집]

에도시대의 코요군감(甲陽軍鑑)에서의 등장 이후[편집]

야마모토 간스케를 군략과 축성에 뛰어난 무장으로 묘사한 최초의 사료는 에도시대 초기에 쓰여졌다고 생각되는 코요군감(甲陽軍鑑)으로서 , 그 후에는 그런 이미지가 에도시대에는 전쟁이야기로 널리 퍼져, 여러가지로 각색되어 천재적인 "군사 야마모토 간스케" 상을 형성했다. 에도시대에서의 코요군감(甲陽軍鑑)은 군사학의 성전처럼 존중되어 널리 읽혀졌으며, 이에 야마모토 간스케라고 하는 명군사의 존재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엔록(元禄)시대에 작성된 마츠라 시게노부의 무공잡기에 의하면 야마모토 간스케의 아들이 아버지인 야마모토 간스케의 이야기를 창작하였으며, 고우사카 마사노부의 이야기를 모방하여 코요군감(甲陽軍鑑)이라고 이름붙인 창작물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예전부터 위조된 이야기라고 널리 퍼져있었다. 야마모토 간스케라고 하는 사람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코요군감(甲陽軍鑑)은 창작물이며, 군감과 틀리게 신겐의 군사가 아니라 야마가타의 가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증사학의 영향과 이치가와家의 문서, 마시모家의 문서 발견[편집]

메이지시대부터 근대적인 실증주의 역사관이 일본에 들어와 "태평기","태합기"등의 고전적인 전쟁이야기에 대해 사료적인 비판이 일어나, 이런 사료들을 부정하게 되었다. 1891년 , 동경제국대학 다나카 요시나리 교수는 논문 『甲陽軍鑑考』를 발표하였다. 코요군감(甲陽軍鑑)의 사료성을 부정, 코요군감(甲陽軍鑑)에만 등장하는 군사(軍師) 야마모토 간스케의 실재를 부정하고, 야마나카 마사카케 수하의 신분낮은 야마모토 간스케라는 졸개병사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다나카 교수는 코요군감(甲陽軍鑑)은 군사학자 아바타 가케노리가 고우사카 마사노리(고우사카 단죠)를 빙자해 만든 창작물이며, 무공잡기(히젠노국 번주인 마츠라 시게노부,1696년)의 기술을 근거로서 코요군감(甲陽軍鑑)은 간스케의 아들인 간잔파 승려의 메모를 참고하여 쓰여졌으며, 이 승려의 메모상에는 공적과 활약이 너무 부풀려져 있으며 일개 졸개병에 지나지 않았던 간스케가 다케다의 군사로 창작되었다고 한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가인 다나카 요시나리의 견해는 귄위는 매우 큰것이었으며, 다나카의 고교후배인 와타나베요수케 교수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 이후에는 코요군감(甲陽軍鑑)을 역사학의 논문자료로서 사용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간스케의 활동은 고사하고 이름 자체가 다른 사료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야마모토 간스케는 사실로 인정되지 않고 , 가공의 인물로 굳어지고 있었다.

1969년 방송된 대하드라마 하늘과 땅을 시청한 홋카이도 쿠시로시의 시청자가 선조로부터 전해내려오는 고문서에서 전국시대 사람으로 생각되는 야마모토 간스케(山本菅助)의 이름이 적혀있는 한통의 서찰을 찾아내어 감정을 했는데,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청자의 선조는 시가노국의 호족 이치가와씨로 생각되며, 이 고문서와 서찰은 메이지시대에 대대손손 전해진 이치가와문서(대부분의 혼마 미술관 소장)를 타가문에 양보하는 사이 일부분이 남았다고 여겨진다. 이 서찰의 발견에 의해 존재가 부정되어졌던 야마모토 간스케의 존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2008년에는 군마현 안나가시 모리후루사토학습관의 마시모家 문서조사에서 다케다家 관련 문서가 나왔다. 이를 야마모리 현립박물관에서 재조사 하였는데 5점의 야마모토 간스케(山本菅助)의 신문서가 확인되었다. 이 5점의 문서는 야마모토 간스케(山本菅助) 앞으로 문서4통 간스케 자손의 야마모토계 앞으로 생각되는 2통의 문서가 있어 이치가와문서 이후에 야마모토 간스케 관련 문서로서 주목됨과 동시에 야마모리현 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간스케의 자손의 동향도 알게 되었다.

이치가와 문서로 부터 야마모토 간스케는 동시가노,우에노 방면에서 활약하던 다케다 가신으로 추청된다.(히라가와,니시가와) 이치가와문서,마시타문서에 나오는 야마모토 간스케(山本菅助)가 군감에 나오는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 인지는 견해 일치를 보지 않고 있다. 한편, 일설에는 山勘를 야마캉으로 읽었는데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로 유래되었다는 억측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