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WonRyong/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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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요 정보만 모으고 있음. 멀뚱이 2005년 12월 11일 (일) 09:54 (KST)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숭배하는 우리나라 유일한 정통 민족종교로 현재 전국에 50만 신도가 있으며 시교당 60여개와 수도원 40여개등의 조직을 갖추고 포교활동을 하고있다.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으며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독립군 지도자,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도로서 언급할 수 있는 대표적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꼽는다면 김교헌·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이상룡(李相龍)· 유인식· 정인보(鄭寅普)· 안재홍·장도빈(張道斌) 등이다.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은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후일 ‘조선어학회’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주시경(周時經)은 배재학당을 졸업하면서 받은 예수교 세례를 과감히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한다.

해방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집권과정에서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김구(金九) 선생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종교 인사를 정부 요직에 끌어들였다. 건국내각에는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해 이범석(국무총리)·안호상(문교부장관)· 명제세(심계원장)· 정인보(감찰위원장)· 신성모(국방부장 관)씨 등 6명의 대종교인이 참가했다. 또 미군정 시절에는 안재홍 선생도 민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만주로 망명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으로 전환,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군 양성소 만들고 청산리전투를 비롯해 벽오동·대전자전투 등 수많은 독립전쟁을 주도했다.

윤 교수는 대표적 사례로 대한제국시기 애국계몽운동을 강렬하게 벌이던 우국지사 나철(羅喆)이 1909년 김윤식(金允植) 등과 함께 서울 삼청동 취운정에 모여 단군교의 중광을 선포한 것을 들었다. 이는 고조선에서는 신교(神敎), 즉 대종교(大倧敎)라 한 이래 부여(扶餘)에서 숭천교(崇天敎), 신라에서 경천교(敬天敎), 고구려에서 대도진종(大道眞倧),발해에서 임검교(壬儉敎),고려에서 주신교(主神敎)로 계승 신앙되어 오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단절됐던 단군교를 부활시켰음을 뜻한다.

단군교는 이후 '대종교'(大倧敎)로 개명하면서 2년만에 교인수가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윤 교수는 대표적 인물로 대종교의 3대종사(三代宗師)의 한사람인 서일(徐一)을 꼽았다. 그가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에는 교도인 현천묵(玄天默),조성환(曺成煥),이장녕(李章寧),계화(桂和),이범석(李範奭),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 등이 중요 간부로 참여했으며 단원은 거의 대종교 교우로 구성되었다. 1920년 10월 독립군사상 최대 승첩으로 칭송되는 청산리전투도 이들이 이끌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과 국무총리대리로 활동하면서 교우인 이시영(李始榮),조구(趙九),조성환(曺成煥),김두봉(金枓奉) 등과 같이 선교활동에도 전력을 기울여 대종교를 임시정부의 국교 지위까지 향상시키고자 노력했다.

독립운동가 홍암 나철이 1909년에 중광(重光·제2의 창조)한 대종교는 민족 고유신앙인 단군교에 그 기원을 둔다. 단군교는 최치원이 ‘난랑비’에 우리 고유신앙으로 밝혔던 선교(仙敎)와 풍류도, 신선사상, 화랑도 등과 그 맥이 닿는다. 나철은 민족의 시조를 다루는 단군교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대종교로 개명했다고 한다.

토인비는 ‘종교가 민족과 문명을 이끄는 핵’이라고 했는데, 우리 근대사에서 무엇이 독립운동의 핵이었나를 연구해 보니 바로 대종교였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홍범도 김좌진 같은 독립군사령관,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같은 역사학자, 최현배 이극로 김윤경 같은 국어학자들이 모두 대종교 신자였다고 소개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민족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며 일제에 항거했다는 것.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대종교는 무장 독립 세력을 이끈 핵심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지금까지 대종교를 다루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터라 기존 학계에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박정근 PD -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 제1화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 (2004년 2월29일 방송)


일제가 대종교를 탄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좌진, 홍범도, 주시경, 이시형, 안재홍, 이상설. 또 임시정부 2기 의정원 29명 가운데 21명 등 주요 지도자들은 대부분 대종교인이었습니다.


근현대 100년 동안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크고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면 저는 나철을 첫번째로 꼽겠습니다.”국사편찬위 편사실장과 성균관대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역임한 역사학자 박성수(72) 교수가 꼽은 인물은 바로 나철이었다. 평생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온 노학자가 여러 독립운동가 가운데에서도 독립운동사 첫머리에 올려야 할 인물로 나철을 꼽았다는 점은 다소 뜻밖일 수도 있다. 흔히 독립운동 하면 안창호나 신채호를 떠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 병사들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으며, 신규식 등 상해임시정부의 주요 활동가들, 한글문화운동의 주역 주시경 등이 모두 대종교인이었고, 이들의 정신세계 속에 나철이 있었다는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단군 숭배의 기운이 팽배한 가운데 창시된 대종교가 창교 2년 만에 2만여 교인을 포용한 교단으로 확장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 시기에 고조선사를 서술한 ‘단기고사’ ‘환단고기’, 그리고 대종교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삼일신고’ 같은 책들이 나온 것이다.

유명한 대종교인들 (가나다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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