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yojun Park/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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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시오 슈월츠
Aloysius Schwartz
출생1930년 9월 18일
워싱턴 D.C., 미국
사망1992년 3월 16일(1992-03-16)(61세)
마닐라, 필리핀
사인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 (ALS: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일명 루 게릭 병)
국적미국미국
종교가톨릭 신부(Fr.), 몬시뇰(Msgr.), 가경자 (Venerable)

<<편집자 주: 걱정하지 마세요 - 위키에 올릴 때 제목 줄에 있는 '사용자:Hyojun Park/연습장 편집하기'는 알로이시오 슈월츠로 바꿀 겁니다.>>


알로이시오 슈월츠 (Aloysius Schwartz, 한국 이름 소재건) 몬시뇰(Msgr.)은 1930년 9월 18일 미국 워싱턴 D.C. 에서 출생하였다. 사람들은 신부님을 알로이시오 신부님, 알로이시오 몬시뇰,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 파더 알(Fr. Al) 등으로 호칭한다. 사제 서품 이후 한국, 필리핀, 그리고 멕시코에서 자선과 교육 사업을 운영하던 중 1989년 10월 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 (ALS: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일명 루 게릭 병) 진단을 받았고, 1992년 3월 16일 필리핀 마닐라 소녀의 집에서 선종하셨다. 로마 교황청은 알로이시오 슈월츠 신부님께 1990년 2월 1일 몬시뇰(Msgr.) 칭호를 수여했고, 2015년 1월22일 가경자 (Venerable)로 선포하였다.


유년 시절[편집]

알로이시오 슈월츠는 아버지 루이스 슈월츠(Louis Schwartz)와 어머니 시델라이 보우라사(Cedelia Bourassa)의 8 자녀중 셋째 아들로 1930년 9월 18일 워싱턴 D.C.에서 출생하였다. 몬태나(Montana) 출신의 시델라이 보우라사는 1차 세계 대전 중 워싱턴 D.C.로 이사했고, 당시 가구 방문 판매를 하시던 루이스 슈월츠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알로이시오는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필요한 사람을 돕는 신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신학교와 사제 서품[1][편집]

알로이시오는 여러 면에서 우수했다. 소신학교를 졸업 할 때는 장학금 제의도 받았고, 대신학교 시절 철학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게 되자, 담당 교수는 그를 장차 교수로 키우고 싶다고 말하였다. 알로이시오는 수도 생활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재속 사제직을 통해서만 안정없는 가난한 자의 생활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47년 메리놀 외방 선교회에 입회하였으나 곧 크게 실망하였다. 메리놀 회원 역시 부자 '미국인' 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외방 선교의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동료 신학생들과 가진 토론은 그의 메리놀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확인시켜주었다. 저개발국가의 생활과 비교할 때, 미국인 메리놀 회원들은 지나치게 부자라고 생각했다. 알로이시오는 미국 일리노이 글렌 엘린 소재 메리놀회 신학교(Maryknoll College at Glen Ellen, IL)에서 학사과정(1948-1952)을 마친다.

메리놀회의 정신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한 알로이시오는 외국 선교를 통해 가난한 재속사제로 양성시켜줄 신학교를 찾기로 했다. [레브 벵상 신부 (벨기에)]가 창설한 '선교 협조자회' (Societ des Auxiliaries des Mission, S.A.M) 를 알게 되었다. S.A.M 은 수도회가 아니라 벨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적 모임으로, 1954년 당시 회원들은 유럽 8개 내지 10개국에서 온 신학생들이었다. 이 회의 출신 사제들은 중국, 대만, 베트남, 인도, 스리랑카, 일본, 한국, 아프리카에서 방인 주교의 관할권 밑에서 일했다. 이 선교회의 첫째 목적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방인 주교 밑에서 일할 유럽 출신 재속사제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입회 허락을 받은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고모 수녀로부터 그가 시도하는 새 출발이 엄청난 실수라고 지적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는 레브 신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주장한 가난을 구체화한 사제였고, 이 사실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벨기에 루벵 대학 신학부의 지식 분위기는 개방적이며, 탐구적이고, 자유롭고 활기가 넘쳤지만 벨기에의 생활은 고되었다. 그는 그때의 생활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모든 면에서 지극히 어려웠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독하게 힘들었다." 불어에 능통하지 않은 상태로 도착했고, 음식은 전혀 입에 맞지 않았고, 겨울 추위를 덜어 줄 적절한 난방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루벵대학교에 등록했을때는 학기가 이미 4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래도 특유의 강한 기질로 그는 초기의 모든 난관을 극복하였다. 진보적이며 박식한 교수가 가르치는 신학은 그가 맞서야 할 힘든 과제이었다.

S.A.M.의 3년간의 신학 공부에 1년간의 수련 기간이 있었다. 수업이 없는 여름 방학동안 소 신부는 지금은 구식이라 할 수 있는 일명 '히치하이킹' 이라고 말하는 '엄지손가락 치켜들어 공짜 차 타는 여행 방법' 을 이용하여 유럽 여러 곳을 무전여행 했다. 이 여행을 통해서 유럽 농촌의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언어 연습을 했고, 농촌 일도 도우면서 낯선 문화와 전통을 익혔다. 여러 번의 여행 중 한 번은 서부 벨기에에 위치한 바뇌 성모 성지를 찾았다. 이 성모 성지 방문은 그를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깊은 내적 평화를 얻었다. 그의 방문은 완전한 가난 안에서 삶을 살려는 자신의 항구한 결심을 굳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께 자신을 봉헌했다. 그리고 후에 동정녀에게 특별히 봉헌된 수도회를 창설했다. 5년 동안 15회에 걸쳐 바뇌이 성모 성지를 방문한 알로이시오 신부는 사제 서품전 방문에서 가난한 이의 동정녀에게 자신의 사제직을 바쳤다.이 일련의 사건을 성모님의 안배로 여긴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의 수필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께 속한 나의 사제직’(Mon Sacerdoce Appartient a la Vierge des Pauvres, 바뇌 성모 성지 총사무국에 보관 중)에서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에게 속한 사제입니다.” 라고 밝혔다. 그리고 바뇌 성지가 속하는 리에지 교구의 커크호프 주교(성모님께서 작은 바뇌 마을의 어린 소녀에게 발현한 사실을 공인한 분이시기도 하다.)로부터 부제품을, 그리고 같은 주교의 명의로 미국 워싱턴 DC 대교구의 성 마틴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1957년 6월 29일), 이해에 선교지 한국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부산교구에 입적하였다(1957.12.8)

사제품은 신학생에게 일생 중 최고의 순간이다. 소 신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루벵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여 곧 그의 여동생들은 사제 서품을 축하할 그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 왔다. 물론 지나치게 이른 일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바뇌에서 뜻 깊은 기쁨과 평화를 얻었던 경우같이, 자신의 일생 중 최고의 순간에 대해서도 길고도 상세한 설명은 발견할 수 없다. 몇 안 되는 그의 편지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그러나 크게 놀랄 일이 아닌 것은 신품성사는 자신의 일생에 큰 의미를 준 유일한 사건이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는 항상 하느님의 사제되기를 원했고, 또 사제가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고 일신상의 문제이었다. 하느님은 그를 '제2의 그리스도' 로 만드셨고,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도록 그를 축성하셨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실체를 말로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소 신부는 루벵 가톨릭대학에서 당시 사회학을 공부하던 장 요셉 신부 (1919-1990, 1954년 루벵대학에 유학, 1957년 부산교구 중앙 성당 주임신부겸 교구 총대리로 임명되었고, 1968년 마산교구 제2대 교구장이 됨)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한국인의 생활상을 듣게 되었다. 의지할 곳 없어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었으나, 한국천주교회도 역시 물질적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처지가 못 되었다. 소 신부는 자신의 이상에 충실하려면, 한국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과 필리핀에서의 자선 사업[편집]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1961년에 워싱턴에서 민간 원조 기관인 한국 자선회(Korean Relief. lnc. 현재는 World Villages for Children (Annapolis, MD)로 바뀜)를 설립, 이 기관을 통하여 모금한 기금으로 한국에서 구호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부산교구 송도 본당의 주임신부로 재직(1962 - 1966)하면서 1964년 마리아 수녀회를 창설하였고,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마리아수녀회의 소명에 전념하기 위하여 5년 동안의 송도 본당 주임직을 사임하였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생전에 한국, 필리핀, 멕시코의 6개 도시에 의료시설과 정규교육기관을 갖춘 6개소의 소년/소녀의집을 설립하여 수많은 불우 어린이와 청소년을 돌보았다. 1969년 7월에는 부산시의 노숙자 200명을 보호하는 마리아수녀회 구호소를, 1981년에는 서울특별시의 노숙자 2000명을 돌보는 마리아수녀회 ‘은평의 마을‘을 시작하였다. 1981년 5월 10일 그리스도 수도회를 창설하였고, 이 수도회를 통해 은평의 마을을 운영하였다. 은평의 마을은 2010년 12월 29일부터 서울시에 이관되어 운영되며 마리아 수녀회는 가경자 알로이시오 사제의 제자이신 수녀님들께서 한국은 물론 세계 6개국에 직접 관리 운영하고 있다.

ALS 투병과 선종[편집]

1989년 10월 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 (ALS: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일명 루게릭 병) 진단을 받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ALS를 하느님의 선물이라 여겼고, 기쁘게 받아드렸다. 고통스런 투병 기간 동안에도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휠체어에 의지하여 필리핀과 한국, 한국과 멕시코를 왕래하며 하느님 사업을 속개 하면서도 한국과 필리핀을 떠나 그의 세번째 자선 사업을 멕시코에 펼치게 되어 1991년 10월 멕시코 찰코시에 2000명의 불우 청소년을 돌보는 소녀/소년의집의 1단계 사업을 완성 개원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5개월 후 1992년 3월16일 마닐라 산타 메사의 소녀의 집 사제관에서 선종하였다. 멕시코 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서 하루하루 꺼져가는 목소리로 녹음기에 구술 저서인 '조용히 다가오는 나의 죽음’ (원명: Killing Me Softly)의 원고를 임종 9일 전에 탈고 하였다.

신부님의 유언에 따라 마리아 수녀회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를 기리는 벨기에 바뇌의 성모님 발현 기념 경당의 복제 경당을 필리핀 실랑 소녀의집 구내에 건립, 그 제대 아래 신부님의 시신을 묻고, 무덤 위에는 몬시뇰께서 손수 작문하고, 임종 하루 전날에 문장과 철자를 확인한 비문이 새겨진 동판이 놓여있다. “여기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가 묻히다. 모든 찬사와 영예와 영광과 감사를 가난한 이의 동정녀에게 바친다.”(“Here lies Fr.Al Scwartz. All praise, honor, glory and thanksgiving to the Virgin of the Poor!")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그리스도를 열렬히 증거한 삶을 살았던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교황청에서 2015년 1월 22일 가경자 (Venerable)로 선포되어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린다. 현재 시복시성 후보자로 올라 있다.


마리아 수녀회가 지속 추진하는 글로벌 자선 및 교육 사업[편집]

알로이시오 신부의 사업을 이어받은 마리아 수녀회는 현재 한국, 필리핀, 멕시코, 과테말라, 온두라스, 브라질 등 6개국 10개 도시에 의료시설과 정규 교육기관을 갖춘 10개의 소년의 집과 소녀의집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무료 기숙사와 교육시설을 통해 20,665명의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정규 교육과 직업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6년 현재). 또한 마리아 수녀회는 브라질리아의 소녀의집에 이어 상파울로에서 대규모 소년의집 사업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소년/소녀의집 사업 이외에 한국에서 두개의 무료병원, 노숙자를 위한 부산 구호소, 2개의 미혼모 보호시설을 부산과 서울에서 운영하고, 그리스도 수도회는 서울과 파주시에 2개의 부랑인 복지시설을 운영하여 2000명의 집 없는 성인 남자에게 시설 보호와 자활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필리핀 카비테 실랑과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분원을 두어 노숙자 보호를 위한 수도회의 사도직 사업을 계획 중에 있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기 위한 제언[2][편집]

평신도에게

1. 질병의 결과가 아닌 지나친 비만은 사람들이 야위고, 굶어 죽어가는 세계에서는 약간은 비도덕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체중이 과다하면 체중을 줄이도록 결심하시오. 그렇게 해서 절약한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십시오.

2. 술과 담배에 미국인이 연간 소비하는 돈은 210억 달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흡연이 건강의 위험 요소임이 판명된 이상, 담배를 피우면 지금 금연하십시오. 또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절주를 하든지 아니면 완전히 금주를 하십시오.

3. 새 자동차가 필요하면, 늘 좋아하던 모델보다는 그 이하의 것을 사십시오. 그렇게 해서 절약한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십시오. 또 만일 소형차를 구입했다면 그로 인해 절약한 연료비와 유지비는 가난한 사람에게 정기적으로 기부하십시오.

4.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원한다면, 다락방의 헌옷이나 지하실의 장난감 대신 먼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고, 허리의 혁대를 조이고, 희생하기를 생각하십시오.

5. 생각을 가난하게 가지고, 생활을 가난하게 하고, 물건 사기를 가난하게 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예를 들어 버터 대신에 값싼 대용품을 선택하고, 커피에 크림 대신 우유를 사용하십시오. 비프스테이크를 먹는 대신 때때로 샌드위치를 먹으십시오. 기타 등등…

6. 자캐오가 개종할 때 말하기를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네 곱절을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한 달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이 세상 가난한 사람 안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근심과 고통과 굴욕을 덜어주기 위하여 기부하십시오.

7. 일단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면, 나팔을 부어 그것을 온 세상에 알리지 말고 선전을 최소화 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이 준 자선의 돈에 감동적인 답례를 바라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만일 제3세계 나라의 보육원의 한 고아에게 양육비를 정기적으로 보내준다면, 그 고아에게 매달 영어로 된 감사 편지 받기를 고집하지 마십시오. 이 편지를 작성하고 보내는 데 드는 비용은 여러분이 돕는 고아의 식량과 의복을 사는 돈을 잠식합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8. 가족 중에 사망자가 생기면, 품위를 갖춘 장례를 치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간소하게 하십시오. 허식을 위한 값비싼 관이나 수의를 사는데 엄청나게 과도한 비용을 사용하는 것은 지나친 낭비입니다. 한국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는 간소하고도 품위 있는 그리스도교 예절을 갖춘 장례에 불과 15달러이면 충분합니다. 부자 나라에서 시신을 땅에 매장하는데 50배에서 100배의 돈을 사용하는 것은 꼴사납고, 더 나아가 망측하기까지 합니다.

9. 외국 원조에 관한 대화 중 만일 “가난한 자는 너희 가운데 항상 있기 마련이다.” 혹은 “내가 내 동생의 보호자인가?” 혹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 주는 만큼 그들은 우리를 미워한다.”라는 진부한 말을 듣게 되거든 이 말들을 배척하십시오. 대신 고율의 세금을 지지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당국은 개발 노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저개발 국가의 수입품에 고가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을 지지하십시오. 그러면 그 국가의 생산자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를 떠나 개발도상 국가에서 봉사할 것을 장려하십시오.

10. 여러분의 본당 신부에게 적어도 교회 수입의 10%를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청하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허락하면, 꼭 필요하지 않고 당장 필요하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본당의 건축이나 개보수 공사 계획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십시오.


교구 사제에게

1. 1968년 한 해 동안 미국의 천주교회는 교회 건물을 개․보수하는데 5천만 달러를 소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보수 문제가 생길 때, 교회를 압박하고, 교회의 생명력을 빼앗는 거대 건축물을 지향하는 주장에 조용한 항의를 하십시오. 대신 아낀 돈을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금으로 내놓음으로 교회의 내적 쇄신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십시오.

2.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 성인에게 성령을 사기 위하여 돈을 제공했을 때, 사도께서는 큰소리로 야단쳤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너의 금전과 은전이 너와 함께 망할지어다!”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 미사 예물의 남용을 공박하는 데 당신도 일조를 하십시오. 미사에 가격표를 부치고 그 금액을 ‘자유의사의 예물’이라고 부르는 대신, 미사 지향을 적은 종이 쪽지는 사제에게 주고, 예물은 금액을 표시하지 않고 본당의 자선함에 넣도록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혹은 더 좋은 방법으로, 미사 예물 제도를 아예 없애는 계획을 세워 보면 어떠할까요?

3. 왕이나 왕자가 일반 본당 신부보다 결코 잘 먹고 잘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적하여 왔습니다. 자발적 독신 생활이 육체적 만족을 주는 음식물에 탐닉해도 좋다는 무한의 허락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 러시아의 격언을 의역하면, “빵과 소금을 먹고 복음의 진리를 전하시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4. 노년 복지 보장 증후군에 걸리지 말고, 결코 안 올지도 모르는 비오는 날을 위하여 부를 축적하지 마십시오. 대신 미래를 위한 빈틈없는 최소한의 준비와 하느님 섭리에 대한 어린이다운 최대의 신뢰 사이에서 만족한 타협점을 찾으십시오.

5. 매년 실시하는 연례 피정 다음에는 가진 재물을 정리하여 꼭 필요하지 않는 물건은 모두 없애 버리십시오. 그 물건을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 주든지 혹은 팔아서 그 돈을 구호금으로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의 내적 자유를 구속하려고 살며시 다가오는 물질주의와 욕심을 경계하십시오.

6. 주식과 채권을 당신 생활의 방편이나 개인의 사도직 방편으로 삼지 마십시오. 신문의 금융면은 금융 수완가들에게 맡기십시오. 여분의 돈이 있으면 이 세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영원의 투자를 하십시오.

7. 개인적 즐거움을 위하여 부동산을 사지 마십시오. 사냥꾼의 집, 해변의 집, 혹은 낚시를 위한 집을 사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여분의 자금이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로 집 관리와 유지에 소모될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굶주리는 제3세계 국가의 국민 1인당 1년 평균 수입에 해당하는 150달러 이상의 돈을 휴가비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8. 휴가에 대해서 말하자면, 휴가는 근본적으로 풍요 사회의 시민에게만 가능한 중산 계급 사회의 제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은 휴가라는 말의 의미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이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정식 휴가 기간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을 어떤 형태로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 활동에 이바지하십시오.

9. 가난은 근로를 의미합니다. 가난의 본질은 한 개인의 시간을 능률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는 하루에 몇 시간의 활동을 하고 그 대가로 비프스테이크와 애플파이를 먹습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일출에서 일몰까지 땀 흘리며 근육을 뒤틀고 허리가 휘는 노동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끼니를 보장받으려는 이런 노동마저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쓰는 곳(부산교구 송도성당)에서 고함치면 나의 소리가 닿는 곳에는 십대 남녀 약 30명이 일하고 있는 유리 공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침 7시까지, 일주일에 7일간, 일당 25퍼센트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형적 대우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일반적으로 여러분의 활동 페이스가 약간 지나치게 느리고, 지나치게 느슨하고, 지나치게 게으르지는 않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10. 본당 수입의 10%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부할 것을 본당 방침으로 정하십시오. 그 중 일부는 도시 빈민을 위하여, 그리고 나머지는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십시오. 본당의 강론대를 외국 선교와 자선 사업을 위한 모금용으로 자주 개방할 것도 본당 방침으로 정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갈 수 없으면 자격 있는 형제 사제더러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도록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아메리카로 갈 것을 권하십시오.


선교 사제에게

1. 선교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단순히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고 당신의 본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복음에 바탕을 둔 당신의 책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구세사업 계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절대적 우선권과 특권을 가졌음을 인식하십시오. 강렬하고 열렬한 예언적 선교 감각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십시오.

2. 시설이나 조직을 만들려고 지나치게 서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며 보다 카리스마적 방식으로 좋은 소식을 설교하십시오. 자선과 정의에 기초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울 것을 추구하고, 가능한 벽돌과 회반죽의 건물 건축은 뒤로 미루십시오.

3. 교회 건물이 꼭 필요하면 본당 신자들이 적어도 건축 비용의 51%를 부담하도록 권유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완성된 교회가 비록 막사같은 건물일지라도 신자들은 이것을 보고 “이것이 우리의 교회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4. 당신의 사제적 가난의 기준을 선교지 나라 사제의 생활수준에 맞추지 마십시오. 오히려 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이상, 즉 복음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선택하십시오.

5. 오도된 관용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가난을 배반하지 마십시오. 개인의 생활방식을 주위 사제들의 생활방식에 맞추려고 자나친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의 것을 만드십시오. 시대 풍조에 따르지 말고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십시오. 비록 당신의 행동이 선배 사제나 이웃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에게 조용한 책망의 인상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6. 선교 지역의 부유한 사람들이 당신이 구상하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 흥미를 갖지 아니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설교한 메시지가 그들의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질책이 되고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7. 1년에 한 달 동안 고국의 가족과 함께 보내는 통근식 선교사가 되기를 피하십시오. 모든 구실을 동원하여 카메라와 관광 안내책을 들고 여행하는 관광객 선교사가 되기를 피하십시오. 선교지 나라의 부자와 중산층의 문화를 취미 삼기를 좋아하고, 빈민가의 하위문화에는 완전히 무지한 문화․예술 선교사가 되기를 피하십시오.

8.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지른 불의를 보고도 평지풍파를 두려워하여 침묵하는 것을 피하십시오. 비록 교회의 권력자가 저지른 불의라도 침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놓으려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한 불은 근본적으로 정의를 말합니다.

9. 어느 시대나 어느 장소에서나 가난한 사람들이 첫째로 걱정하는 것은 하루의 양식입니다. 사제의 가난의 의미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균형 잡힌 식사와 단순한 음식은 반드시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건강에 좋고 영양 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여러분이 부엌에서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험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10. 그리스도인의 가난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곧 영적이어야 하고, 물질적이어야 하고, 기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야 하고, 어떤 방식이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수도자에게

1. 어떤 수도자들은 비용과 상관없이 가난해지려고 결심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만든 샌들이나, 망토 등을 조달 받기 위해서 큰 지출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3~4백 년 전 그들 수도회의 창설자가 가난의 표시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수도자의 가난을 잊도록 하십시오. 상식에 맞는 20세기 식 빈자(貧者)의 가난에 더 신경을 쓰십시오.

2. 인간사에서 생긴 모든 재정적 횡재를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결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받은 모든 선물에 결점이 있나 잘 살피고, 때에 따라서는 거절하는 용기도 가지십시오.

3. 1백만 달러 혹은 3백만 달러 혹은 6백만 달러짜리 수도원 건물로 방문객을 안내할 때 다음과 같은 설명의 반복을 삼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너무나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혹은 “이렇게 훌륭한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요셉 성인에게 감사합니다.” 비록 정신적 교훈을 위하여 그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정황에서는 반대의 반응을 자아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고가의 취향 때문에 하느님과 요셉 성인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대신 정직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겸손을 가지십시오.

4. 영양식을 취함으로써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경제적 논리로 식탁의 사치스런 음식을 변호하지 마십시오. 워싱턴의 농무성에 질의를 하면, 비록 최고의 맛은 없어도 하루에 1달러 이하의 비용으로 영양이 완전히 고루 갖춘 식단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5. 여러분이 출판하는 잡지가 정말 필요한지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보십시오. 단순히 명성을 얻기 위한 집단적 욕망의 표현은 아닙니까? 기부를 청하는 여러분의 호소가 정말 정직합니까?? 수도회 선전의 극대화를 위하여 모금액의 겨우 5%를 수도자의 해외 활동비로 사용하고 90%는 모금 비용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까? 부자의 수도회를 만들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의 이름으로 모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6. 예수님은 일생 동안 당신이 태어나신 장소에서 350킬로미터 혹은 5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장소에서 125킬로미터를 여행하는 사치도 갖지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여행할 기회가 오면, 그 여행이 정말 필요한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7. 재정 분야, 정치 분야, 그리고 지식 분야에서 수도자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이 엘리트들은 종종 사람을 현혹시켜 교회에 선보다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구원 계획에서 유일하게 참된 ‘엘리트’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 노력을 집중하십시오.

8. 불안정한 생활은 가난한 사람들의 본질적 요소이며, 모험은 그리스도교가 가진 고유의 요소임을 기억하십시오. 부르주아적 사도직이나 근심 없는 청빈을 갈망하지 마십시오. 불확실성, 불안정한 생활, 그리고 미지의 세계 가운데서 심리적 안정을 구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게 될 것입니다.

9. 만일 당신이 수도 공동체의 건축 책임을 맡고 있는 원장이라면, 공동체의 가장 허약한 회원에게 편리하고 만족을 주는 설계를 하지 마십시오. 단순히 당신 아래 있는 회원의 불만과 비평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음의 정신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그들이 힐튼 호텔보다 못한 부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것이라고 염려하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불의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10. 공동체가 가진 금전이나 인력의 10%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주교에게

1. 한 재미있는 미국 주교가 “나는 백만장자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백만장자처럼 살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우습지 않은 사실은 많은 주교들이 백만장자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처럼 먹고, 그들처럼 입고, 그들처럼 여행하며, 그들의 것과 같은 집에서 생활합니다. 손수 육체노동을 하면서 가난이 주는 위험과 굶주림의 의미를 터득했던 바오로 성인을 닮는 주교가 되도록 결심하십시오.

2. 제3세계 국가에서 구걸하러 오는 동료 주교를 피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자신이 가난하다고 말을 해도 당신을 찾아 온 주교에게는 이 말이 불가불 아무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의 교구가 1천만 달러의 부채를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이것은 당신의 교구가 꼭 가난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신용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모든 미국인은 집과 자동차와 가두 등에 할부금을 지불하는 부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3. 성소 면에서 ‘영적 산아제한’을 포기할 것을 결심하십시오. 성소는 주교의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만일 선교 단체가 좋은 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꾼을 찾는다면, 선교 성소를 찾는 모든 단체에 교구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4. 선교사가 되려는 의욕을 가진 교구 신학생이나 젊은 사제가 있다면 방해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3년, 5년, 혹은 10년을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대신 관대하게「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충실히 따르도록 하십시오. “주교들은 청소년들과 성직자들 가운데서 선교회 성소를 기꺼이 증진하고, 하느님께서 교회의 선교활동에 참가할 어떤 이들을 뽑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쳐야 한다.(38항)”

5.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적어도 한 번은 제3세계의 나라를 방문하도록 하십시오. 지구상 인구의 반이 생활하는 모습을 직접 정기적으로 목격한다면 결코 전과 같은 생활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6. 장차 주교가 될 후보 성직자에게 드리는 제언으로, 만일 주교 임명을 받으면 관례에 따르되 다섯 개 자릿수의 비용이 소요되는 성성식 후 축하행사를 생략하시오. 오히려 기쁨의 빵을 나누는 행사를 최대한 단순하게 치르고 절약한 돈은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십시오.

7. 만일 주교관이 도시 교외에 위치하면, 도심의 본당 사제관으로 혹은 중하위층 생활자가 거주하는 아파트로 이사할 것을 고려해 보십시오.

8. 컨트리클럽의 회원권을 포기하십시오. 졸부들과 어울리기를 그만하시고 보통 사람들과 더 가까이 하십시오.

9. 미래의 교회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임을 명심하십시오. 교구에서 꼭 필요한 교회건물 건축만 승인하십시오. 이미 승인한 건물 설계를 간소화, 단순화하고, 건물의 모든 기능이 완전한지 살펴보십시오.

10. 교구 수입의 10%를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십시오. 또한 교구 사제의 10%는 적어도 한 번은 선교 사업에 봉사하도록 권고하십시오.

성인 시복시성 진행 과정[편집]

2003년 이후, 알로이시오 신부의 성인 시복시성을 진행하고 있다.

2003. 12. 10[편집]

알로이시오 슈월쓰 몬시뇰의 시복시성 소송진행 선포식 및 성찬예절 (개막식)

주례자 : 마닐라 대교구장 가우덴시오 B. 로잘레스 대주교

강론자 : 리카르도 비달 추기경

장소: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 원죄없으신 성모 대성당

개막 미사 강론 (필리핀 세부 대교구장 비달 추기경)[편집]

오늘, 우리는 알로이시오 몬시뇰을 제대 상 영광의 인물로 추대하려는 시복 운동의 첫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알로이시오 몬시뇰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목격한 우리 모두에게 오늘은 '기쁨의 날'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집이 아니라면. 그 집을 지은이의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알로이시오 몬시뇰께서는 자신의 사업을 하느님의 말씀 위에 세우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그분께서 설립한 복지시설을 통해서 희망을 찾은 수천의 청소년들의 삶에서 그분의 사업이 열매를 맺고 있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룩한 사업을 볼 떄, 그 분의 넓은 선견지명(先見之明)과 고귀한 정신에 경탄(驚歎)을 금할 수 없고, 경외심(敬畏心)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소년의집과 소녀의집을 방문하면 진실로 하느님의 손이 알로이시오 몬시뇰께 닿아서 이 분이 남긴 발자국은 임시방편이나 평범한 사업이 아니고, 거인의 걸음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을 볼쌍히 여기는 마음,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는 깊은 믿음, 그리고 행동하는 정신이 모두가 그 분을 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근대성인의 위대함을 특징짓는 덕행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 '믿음' , 그리고 '양식(良識)'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알로이시오 몬시뇰로 하여금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감각을 주었고 그로 하여금 그가 목격한 사람들의 궁핍을 해결하도록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알로이시오 몬시뇰께서 자신이 원하는 사업을 추구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양식(良識)'은 알로이시오 몬시뇰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믿음'과 '양식(良識)'의 결합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흔한 일이 압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가 넘쳐날때, 성인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에게 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을 말로서 강조만 하지만, 슬픔을 같이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고통을 보고 감동한 끝에 사회조직의 악을 보고 소리지르고, 공격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냥 절망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이 탄식하고 두 손을 놓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그들의 고통 속에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권능과 인간의 선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자의 갈등으로 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부유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난한 이를 도울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부유한 사람이 내는 자금들이 선의의 용도로 사용된다는 확신만 준다면 부유한 자는 타인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자금을 내어 줄 것이라 확신하였습니다. 가난한 이의 궁핍을 보내는데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고 부자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는데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진 자들은 품위 있게 살기를 원하고 가난한자 역시 그렇게 되길바랍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남과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는 방법입니다.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인간을 경제적 노예로 보지 않고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려는' 도덕적 직관을 가진 영적 존재라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뜻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그러한 뜻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바탕이 되는 천을 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마음과 가난한 이의 마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색채를 가진 뜻의 태피스트리(벽걸이 융단)을 만들었습니다.

알로이시오 몬시뇰께서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인간의 선만을 믿은 것은 아니고 절대적인 하느님 섭리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기업가나 자본가들은 그의 방법은 무모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장 결실이 보장되지 않고 시설유지를 위하여 안정된 수입이 보장도지 않는 상태에서 수천의 청소년들을 위한 거대한 복지시설을 짓는데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사용한다는 것이 무책임한 처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단순히 무모한 계획과 참된 믿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그가 돌보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좋은 교육만 받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부잣집 자녀들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 원하였습니다. 소수의 청소년만이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계획하지 않고, 수천 명의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무료로 의식주를 받으며 수학학기를 계획하셨습니다.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마리아 수녀회와 그리스도회 형제자매들이 이 시설들을 유지할 수 있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양식을 무시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노력에 있어 누구보다 더 양식 있는 사람은 알로이시오 몬시뇰일 것입니다. 양식이란 가능성의 인식에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어떤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만일 소수의 은인의 도움에 의하여 작은 고아원 운영이 가능하다면, 수천을 돌보는 시설은 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똑같이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똑같이 후한 인정,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똑같은 하느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새와 꽃을 돌보는 믿음과 양식을 결합하였기 때문에 가능성의 한계를 늘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알로이시오 몬시뇰이 그토록 풍성하게 가졌던 믿음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죽지 아니했습니다. 그 믿음은 마리아회 수녀님들과 그리스도회 수사님들과 함께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은 알로이시오 몬시뇰을 제대상의 영광된 인물로 추대해 줄 것을 청하면서, 그들의 창설자의 믿음을 공번된 교회와 나누어 갖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종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알로이시오 몬시뇰의 생애에서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뜨릴 수 있는 영감을 발견하는 많은 분들은 오늘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03. 12. 11.[편집]

아침 미사 및 아침식사 후 시복 예비심사 법정 개정 및 1차 증인출두 심문인터뷰

2003. 12. 28.[편집]

마닐라 대교구장 가우덴시오 로살레스의 부산교구 사법위원회 설치 요청

2004. 1. 24 - 26[편집]

사미신부님 시복조사의 건으로 부산방문, 이 주교님, 최주교님 인터뷰, 갈멜수녀원 방문

2004. 1. 28 - 29[편집]

사미신부님 시복조사의 건으로 서울방문

2004. 1.30[편집]

부산 교구청 증인 심문(수녀5명, 일반인 3명) 및 질의

2004. 3. 28.[편집]

소송 역사가 호세 알셀리아신부님 한국 방문(3/28~4/3)

2004. 5. 29.[편집]

알로이시오몬시뇰의 시복시성소송 교구절차 폐막식 및 미사, 필리핀가비떼시 실랑 비기 마리아수녀회 소녀의집, 마닐라대교구 소크라테스 빌예가스 보좌주교 겸 법정대표자 주례

법정 대표자 : 소크라테스 빌예가스 주교

재판장 대리  : 예로니모 F.레이예스 몬시뇰

부재판장  : 알렉스 V. 아만디 신부

청원자  : 삼손 실요리케스 신부

법정 진행자 : 호세 로드리게즈 신부

제 1공증관  : 보비 칸라스 몬시뇰

제 2공증관  : 테레시타 A.수말라베수녀

제 3공증관  : 조 마리아수녀


역사위원회

위원장 : 호세 알셀리아신부(예수회)

위 원 : 엘레나 벨라르미노 수녀(마리아회)

위 원 : 세실리아 T. 파발란 수녀 (마리아회)


신학 위원회

위원장 : 예수 로물로 C .라냐다 몬시뇰

위 원 : 에드윈 멜카노신부

위 원 : 니세타 발가스수녀

제1부  : 성찬전례

제2부  : 법정개시 /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의 약력 낭독

공증인 :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의 시복시성 소송 절차를 진행한 법정기록,원본과 사본 2개를 제출함, 인증, 시복시성 성성에 전달 할 전달자를 지명,삼손 실요르케 신부가 지정됨(서약 날인), 봉인

폐막 미사 강론 (마닐라대교구 소크라테스 빌예가스 보좌주교 겸 법정대표자)[편집]

존경하는 여러 주교님들, 여러 신부님, 수녀님들,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친구 되시는 분들, 여러 어린이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는 하느님께서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일생을 통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하여 여기 모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고, 그의 모범은 우리 모두가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 신부로 마닐라 대주교님의 비서로 있던 몇 년 동안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소년의집과 소녀의집 사업에 관여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만남을 통해서 나는 신부님으로부터 세 가지 두드러진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관점에서 이 세 가지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신부님의 거룩함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믿기 어려울 만큼 무서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둘째로 알로이시오 신부님 늘 기쁨과 만족으로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항상 남과 말썽관계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소 신부님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첫번째 특징은 그 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병도 무서워하지 않았었고, 자신의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병을 잘 관리하였습니다. 남이 오해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남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추기경이나 주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남을 엄청나게 사랑했으므로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믿고 자신을 맡깁니다. 바로 이것이 소 신부님에게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소년의집, 소녀의집 아동 여러분, 신부님은 무시당하는 것. 따돌림 당하는 것, 남이 그릇 판단하는 것, 오해 받는 것, 병을 얻는 것, 배고픈 것, 필리핀의 더운 날씨, 한국의 추운 날씨,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 한 것은 한가지 입니다. 아동 여러분, 그가 두려워 한 것은 오직 죄짓는 것이었습니다. 아동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 외 모든 것은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풍성히 주실 것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대에 넘치도록 돌보아 줄실 것이라고.

신부님의 두번째 특징은 그가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할 때나, 장백의에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릴 때나, 로만 칼러에 사제복을 입고 있을 때나, 늘 기쁨과 만족으로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코미디언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농담을 좋아하는 신 추기경님 같지도 아니였습니다. 신부님은 재치가 있었지만 그의 행복은 다른 곳에서 생겨났습니다. 그 행복은 코미디언의 생활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아낌없이 주는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어린이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원하시죠? 늘 행복하기를 원하지요? 행복하려면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남에게 주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남에게 주지 않는 사람은 더 큰 부자가 되지 않습니다. 남에게 주지 않는 사람은 일찍 죽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본질은 주는데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뜻있는 삶을 살기 원하면 주십시오. 삶의 기쁨을 찾고 싶으면 주십시오. 이것이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행한 것입니다. 그는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미국과 구라파에서 기부금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받는 것에 있지 않고, 가진 것을 나누는데 그리고 자신을 주는데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병을 조용히 앓고 있었습니다. 어떤 떄는 자신의 병 때문에 달리다가 넘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중에서도 그는 계속 달렸습니다.왜냐하면 그가 돌보는 어린이들이 달리기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린이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자녀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은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사랑받는 자녀들 입니다. 그는 행복했습니다. 행복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있고, 눈은 빛나고 우리가 이해 못하는 광채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낌없이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계산도 하지 않고 자신을 주었습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삶에서 세번째 특징은 항상 남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항상 남과의 관계가 불편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신체와도 불편했습니다. 항상 위장장애로 고생했니다. 사제들과 주교들과도 불편했습니다. 산타메사 소년. 소녀의집 교사들과도 불편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만일."알로이시오 신부님, 왜 남과 불편한 관계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항상 남과 불편한 관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일은 비난받기 쉬운 일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주는 마음의 상처를 달게 받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함께 마음의 상처를 달게 받겠습니다.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대신하여 마음의 상처를 달게 받겠습니다. 만일 마음의 상처를 받기 원하지 않으려면, 낙담하기를 원하지 않으려면, 절대로 남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만일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알로이시오 신 부님은 상처받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삶은 항상 남을 사랑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남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불편한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스 시톤’은 이런 말을 하기 좋아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당신이 뜨거운 물속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마시오. 오, 뜨거운 물이여, 나는 뜨거운 물을 사랑합니다. 뜨거운 물, 당신은 나를 청결케 해줍니다." 중국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어떻게 하면 차의 색깔을 알 수 있습니까? 차를 뜨거운 물에 넣어야만 차의 색깔을 알 수 있습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자신을 뜨거운 물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알로이시오 신부라는 이름을 가진 차의 진짜 색깔을 우리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 색깔의 의미는 "거룩함"입니다. 평소 겪은 불편한 관계를 통해서 그가 헌신적이었고, 열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고, 그가 겪은 불편한 관계를 통해서 그가 선견지명을 가졌으며, 그가 한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고 하느님의 일이였으며, 그의 일을 완성시킨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로이시오 신부를 기억합니다. 그가 남을 엄청나게 신뢰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움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의 행복은 주는데 있었습니다. 항상 남과 불편한 관계에 있어도 그가 말썽의 장본인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정화되고 궁극적으로 하느님 제단에 만족한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신부님을 가톨릭교회의 복자와 성인의 반열에 들게 해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꼭 허락 하시리 믿습니다. 나는 신부님이 이미 성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나의 생각에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아멘.

2004. 6. 9.[편집]

시복시성 조사자료 로마 교황청 시복시성성에 보냄

2004. 9. 3.[편집]

마닐라교구 승인 시복시성 기도문 나옴

2005. 5. 20.[편집]

시복시성 성성에서 자료 접수 - 이때부터 하느님의 종 명칭 선포

2012. 10. 6.[편집]

시복시성 성성 장관 아마토 추기경께 ‘포시지오’ 제출

2015. 1. 22[편집]

로마 바티칸으로부터 가경자 선포

2015. 3 .14. 소 알로이시오 사제 가경자 선포 교령에 대한 감사미사 (필리핀)[편집]

장소: 필리핀 가비테 비가 소녀의 집 강당 (체육관)

집전자: 루이스 안토니오 따글레 추기경(현 마닐라 대교구장)

합동미사: 추기경 2명 , 주교 6명 사제 48명 *사제단 총/ 56명

미사참례: 필리핀 남여 재학생 4,000명 필리핀 졸업생 및 한국등 외국인 2,000명 *총 /6,000명

교령낭독자 (가경자의 뛰어난 덕행에 대한교령)

가우덴시오 로살레스 추기경(시복시성준비조사 소송을 주관했던 마닐라 대교구 은퇴 대주교)

2015. 3. 15. 소 알로이시오 사제 가경자 선포 교령에 대한 감사미사 (한국, 부산)[편집]

장 소  : 부산 마리아수녀회 대강당

집전자  : 경 훈모(알렉시오)신부 <부산 카톨릭센터장>

미사참례: 수녀. 남여 재학생, 졸업생, 후원자, 재속 삼회원. 기타 (총 1,000명)

2015. 3. 28. 소 알로이시오 사제 가경자 선포 교령에 대한 감사미사 (한국, 서울)[편집]

장 소  : 서울 명동 대성당(서울 주교좌성당)

집전자  : 염수정(안드레아)추기경

(교황대사: 오스발도파딜랴대주교. 조규만(바실리오)총대리주교. 이한택(요셉)주교.

유경촌(디모테오)주교. 정하권(플로리아노)몬시뇰. 안경렬(토마스 대 아퀴나스)몬시뇰.

사제: 배바오로(그리스도회). 이그레고리오(그리스도회). 오수영(오순절수녀회창설자),함제도 제라르도(메리놀수도회지부장). 허보록 필립보(파리외방전교회),김성훈(스테파노)서울대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회장. 오수영. 김인권(요셉)서울대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부회장. 기타 사제단: 총 30여명

미사참례 : 마리아수녀회 수녀 그리스도회수사.재속삼회원. 후원자. 열매. 일반신자 약 1200명 참석

2015. 6. 7. 소 알로이시오 사제 가경자 선포 교령에 대한 감사미사 (Washington D.C., 미국)[편집]

장소: 홀리 네임 성당

집전자: 워싱턴 대교구장 도날드 월 (Donald Wuerl) 추기경

미사참례: 본당신자. 신부님 가족, 친구. 은인. 마리아 수녀. 엘레나 수녀, 위니 수녀


자선 및 교육 사업[편집]

1963 - 1969 부산 서부 빈민 지역에서 모금용 손수건 자수 자조 사업을 전개. 2.000명의 가정 주부에게 수놓는 일감을 공급

1964. 8. 15 가족 단위 고아원 설립

1966. 9. 1 부산 서구 아미동 빈민 지역에 첫 번째 진료소 개설

1967. 1. 18 부산 서구 암남동과 중구 보수동의 빈민 지역에 각 1개소의 진료소 개설

1968. 12. 10 부산 서구 아미동에 아미 고등 공민 학교 설립

1969. 7. 1 부산시으로부터 서구 장림동 소재 행려 환자 구호소의 관리 운영

1970. 4. 10 부산 서구 암남동에 첫 소년의 집 사업 시작 (부랑아 300명에게 안식처와 교육을 제공)

1970. 10. 25 부산 서구 암남동 120병상이 무료 구호 병원 개원

1973. 1. 1 부산 서구 암남동에 공식 부산 소년의 집과 소녀의 집 개원 (1999년 현재 수혜 아동; 1725명)

1973. 3. 1 부산 소년의 집 초등학교 개교(1976년 서울 소년의 집 초등학교에 병합)

1974. 3. 1 부산 소년의 집 중학교 개교(1999년 알로이시오 중학교로 명칭변경)

1975. 1. 1 서울 소년의 집과 소녀의 집 개원(1999년 현재 수혜 아동: 943명)

1975. 3. 1 서울 소년의 집 초등 학교 개교

1976. 3. 1 부산 소년의 집 기계 공업 학교 개교(1999년 알로이시오 전자 기계 공업 고등 학교로 명칭 변경)

1981. 1. 6 서울 시립 갱생원의 관리 운영 인수 (1999년 수혜 인원:집 없는 성인 남자 2.200명; 1996년 7월 1일 '은평의 마을'로 명칭 변경; 2010.12.29 서울시로 이관함)

1982. 6. 29 서울 소년의 집에 12병상의 무료 병원 도티 기념 병원 개원

1985. 2. 12 마닐라 대교구장 하이메신 추기경의 초청으로 소년의 집,소녀의 집 사업 필리핀 진출

1985. 7. 15 마닐라 퀘존 인스티튜트에서 결핵 사업 시작 (무료 수혜 환자: 2.000명.1992년까지 계속)

1986. 8. 15 마닐라에서 소녀의 집 개원(1999년 수혜 아동: 3.600명)

1990. 8. 23 필리핀 세부 딸리사이에 소녀의 집 개원(1990년 수혜 아동: 3,410명)

1991. 7. 23 필리핀 카비테주 실랑시에 소년의 집 개원(1990년 수혜 아동: 2.970명)

1991. 10. 7 멕시코 찰코시 소년, 소녀의 집 개원(1999년 수혜 아동:3,175명)

1992. 3. 16 필리핀 마닐라 소녀의 집에서 선종.


알로이시오 신부 약력[편집]

1930.10.5 홀리 네임 성당 (워싱턴 D.C.) 에서 유아 세례

1944 - 1948 성 찰스 마이너 신학원, 캔톤스빌, 매릴랜드

1948 - 1952 메리놀회 신학교(Maryknoll College at Glen Ellen, IL)에서 학사

1953 - 1957 [벨기에 루벵 대학 신학부] 졸업

1957. 6. 29 성 마틴 성당 (워싱턴 D.C.)에서 사제 서품

1962.6.1 - 1966.12. 한국 부산 교구 송도 성당 주님 신부

1964. 8. 15 마리아 수녀회 창설

1981. 5. 10 그리스도 수도회 창설

1989. 10. 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 (ALS: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일명 루 게릭 병) 진단

1990. 2. 1 교황청으로부터 고위 성직자 몬시뇰(Msgr.) 칭호를 받음

2015. 1. 22. 교황청으로부터 가경자 (Venerable)로 선포됨


저서[편집]

영문판

알로이시오 슈월츠, 1966, The Starved and The Silent

알로이시오 슈월츠, 1967, Armenpfarrer in Korea

알로이시오 슈월츠, 1968, Poverty: sign of our times

알로이시오 슈월츠, 1991, To live is Christ: The Sisters of Mary book of spirituality

알로이시오 슈월츠, 1993, Killing Me Softly:The Inspiring Story of a Champion of the Poor


국문판

소 알로이시오, 2002, 가난은 구원의 징표이다

소 알로이시오, 2002, 굶주린 자와 침묵하는 자

소 알로이시오, 2009,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소 알로이시오, 2012, 조용히 다가오는 나의 죽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마지막 편지, 개정판

소 알로이시오, 2013,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기도

소 알로이시오, 2014, 영성일기

소 알로이시오, 2016, 소 알로이시오 신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버지


관련 서적

Dolores Vita, 2012, My Brother's Witness: Monsignor Aloysius Schwartz (영문판)

마리아 수녀회 AL 연구소, 2013,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의 추억

주선호, 2011, "소 알로이시오의 생애와 가난의 영성을 통해 바라본 현대 사제의 삶에 관한 연구", 석사 학위논문, 광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논문 1/2 논문 2/2

영문 위키 페이지 [Aloysius Schwartz]


수상[편집]

1975. 5. 28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76. 5. 16 5 . 16 민족상 (교육 부문) 수상

1976. 5. 29 포담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 수여

1983. 8. 30 막사이사이상 국제 협동 부문(Peace and International Understanding (PIU)) 수상

1984. 미국의 하원의원 스테니 호이어(매릴랜드 주)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됨

1992. 미국의 하원의원 로버트 도어난(캘리포니아 주)와 주지사 윌리엄 쉐터 (매릴랜드)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됨

2004.4.8 마리아 수녀회 호암상 수상

2010.12.3 도티기념병원 아산상 수상


언론 매체 보도 및 자료[편집]

소년의 집 아이들을 변화시킨 음악의 힘: 카네기홀 무대에서 환상의 하모니 선보인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 (조선, 2010. 5. 10)

KBS 성탄특집 다큐멘터리 '천상의 엄마' 다시보기

'오!마이파파' 티저 예고편 (2016. 11. 6. 개봉 예정)

'부산 수국마을' (유튜브 영상)

'카페 마리아(Cafe Maria)' (유튜브 영상)


[대표적인 뉴스기사 링크]

알로이시오 사제 가경자 선포(평화신문, 2015, 1))

가경자 선포 감사 미사(연합뉴스)

마리아수녀회 설립 50주년(세계일보)

마리아수녀회 설립 50주년(세계일보)

알로이시오신부 책 발간 (부산일보)

영성일기(서울신문)

마리아수녀회 설립 50주년 기념 국토대장정 (부산일보)

소재건 신부의 꿈 칼럼(국제신문)

도티기념병원 아산상 수상(헤럴드신문)

아산상 수상 기사 (문화일보)

바보마음(저자;정말지 이사장 수녀님) (가톨릭신문)

(바보마음 knn방송 소개)

너같이 좋은 선물(저자;박불케리아 수녀님)(연합뉴스)

매년 10월 아트전 개최(평화신문, 2015, 10.)

대한민국 최초의 낙태 반대 운동을 제창하신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어록

소재건,소알로이시오 신부를 닮은 이태석 신부 (조선일보 기사 블로그 스크랩)


[알로이시오 사제 & 마리아수녀회 영상 소개 자료]

그리스도의 향기

마리아 수녀회 소개 영상


외부 링크[편집]

[수녀원]

마리아 수녀회

그리스도 수도회


[생활 보금자리]

부산 마리아 꿈터

서울 꿈나무 마을

부산 송도가정

부산 소년의집


[교육기관]

부산 알로이시오 전자기계 고등학교

부산 알로이시오 초등학교


[의료 및 사회복지]

알로이시오기념병원

도티 기념 병원

모성원

마리아마을


[해외 기관]

World Villages for Children


각주[편집]

  1. 소 알로이시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2009
  2. 소 알로이시오, 가난은 구원의 징표이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