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Ghrrim/한국의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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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에는 약 2 천 5 백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으며 그 중 1,500 만 명이 개신교인이다. 9 백만에서 1 천만 명 중 한 명은 장로교 교인이다. 한국 장로교 교인들은 하나의 장로교 총회에서 시작하여 현재 서로 다른 100개 이상의 장로교 교단에 속한 교회에 출석한다.[1]

역사[편집]

개신교는 선교사들을 통해 19 세기 후반 한국에 소개되었다. 서상륜, 백홍준과 같은 일반 교인들이 개종 후 전도하였고, 가톨릭 교회가 핍박받던 19 세기 중엽 이래 다시 기독교 교회가 한국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83년 서상륜은 한국에서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웠다. 이듬해 미국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호레이스 알렌 (Horace N. Allen)이 한국에 도착하여 1885년에 병원을 시작했다. 북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이 후 선교사로 개신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1889년에 빅토리아 장로 교회,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 1898년에 캐나다 장로교가 각각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 장로교 선교사들은 함께 장로교선교협의회를 조직했고,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개교했다.

1907년에 독노회가 결성되었고,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조선인 목사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어 7 명의 선교사가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2] [3]

일제 강점기 동안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들이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며 일제에 의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일제의 박해는 더욱 심화되었다. 장로교 교인들 중 많은 수가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대립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을 거치는 동안 일제의 강압과 총회의 자발적인 결의를 통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다른 개신교단과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해산되었다. 해방 후 일제가 철수한 이후에 남북 분단이 이어지며 북한에 미국과 대립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박해를 피해 북한지역의 장로교 교인들은 대거 남하하였고 북한지역의 장로교 교회들은 대부분 해산되었다. 남한에서는 1947년 장로교단 재건을 위한 총회가 다시 개최되었고, 그로부터 2 년 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의 장로교단이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남한의 장로교단은 교인 수 가 빠르게 증가하였지만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 찬성 및 일제에 부역한 것을 두고 분열한 것을 시작으로, WCC 가입 여두를 둘러싸고 분열하는 등 여러 차례의 교단 분열이 계속되었다.

신앙고백[편집]

한국 장로교 교단들[편집]

  •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함께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1. Chris Meehan (2010년 10월 4일). “Touched by Devotion in South Korea | Article | Christian Reformed Church”. Crcna.org. 2014년 2월 21일에 확인함. 
  2. [1]
  3.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 World Council of Churches”. Oikoumene.org. 2014년 2월 21일에 확인함. 
  4. Johannes a Lasco Library. “Overview of the worldwide reformed church”. Reformiert-online.net. 2014년 2월 2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