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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데스하임
Rüdesheim am Rheim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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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국가독일의 기 독일
지역헤센 주
행정 구역라인가우-타우누스 군
청사 소재지Markt 16 65385 Rüdesheim am Rhein
시장Volker Mosler (CDU)
지리
면적51㎢
인문
인구9,788명 (2012년)
인구 밀도192명/㎢
지역 부호
지역번호06722, 06726 (Presberg)
웹사이트http://www.ruedesheim.de

뤼데스하임은 독일 헤센주 라인가우지역 라인강가에 위치한 와인생산 및 관광도시이다. 정식명칭은 뤼데스하임 암 라인이다. 뤼데스하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중부라인 상부 문화경관지역에 속하며,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빙엔과 마주하고 있다. 이 도시는 헤센주 라인가우-타우누스 군에 속하며, 니더발트산지의 발치에 위치해 있다.

역사[편집]

선사시대부터 뤼데스하임 부근에 인류가 거주하였고, 이후 켈트족, 우비족, 마티아키족 등이 살았다. 1세기 경에는 로마제국이 타우누스지역까지 확장하고, 뤼데스하임 건너편인 빙엔에 성채를 건설하고, 현재 뤼데스하임 지역에는 알레마니아족과 막는 방벽인 리메즈로 향하는 교두보가 들어섰다. 로마인이 떠난 후 알레마니아족이 차지했고, 민족 대이동과 더불어 프랑크족이 들어왔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리조각 유물에 의하면 이미 이 당시에 뤼데스하임 지역에서 와인용 포도를 생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983년 황제가 마인츠 대주교에서 빙엔지역을 넘긴 베로나 양여에 따라 뤼데스하임을 포함한 라인가우 남쪽지역에 대한 마인츠대주교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기존의 라인그라프의 주민과 귀족들에 대한 지배권이 없어지고, 마인츠 대주교가 재판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라인그라프는 점차 자신의 봉토안에 있던 뤼데스하임 귀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갔고, 종래에는 마인츠 대주교의 봉토안에 편입되었다.

바르도 대주교(1031-1051)는 처음으로 라인가우와 뤼데스하임의 와인용 포도의 식재를 체계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주민의 요구에 따라 포도식재를 위해 뤼데스하임과 아이빙엔의 산지의 개간을 허용했다. 포도밭의 확대는 지그프리드 1세 주교가 통치하던 1074년 산림지역의 개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대주교는 개척지에는 포도만 심을 수 있도록 개간허가를 엄격히 통제했다. 이렇게 150년간 이어진 개간은 이후의 이 지역 부의 토대가 되었다. 1226년부터는 라인가우지역의 개간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 때부터 뤼데스하임의 주 산업은 포도주생산과 강물을 이용한 운송이 되었다.

15-16세기 뤼데스하임 라인가우 게뷔흐트(숲과 덤불로 이루어진 장벽)등의 보호로 전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도시를 보호하는 성벽은 뢰어슈트라세에서 슈타인 가세까지 확장되었고, 여러개의 탑을 세워 성벽을 보강했다. 이 성벽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을 라인우퍼의 아들러투름 정도다. 라인가우 지역의 3대 와인시장중 하나인 뤼데스하임 와인시장은 날로 번성했고, 와인용 크레인인 라인강가에 설치될 정도였다. 선박식 물레는 곡물뿐 아니라 다른 원재료도 생산했다. 당시 라인은 수많은 배로 북적였따. 운송수용가 늘어나면서 뤼데스하임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북쪽인 아스만하우젠이나 뢰어쉬로 난 라인강가 도로가 없어서 육상교통로는 뤼데스하임에서 끝났다. 그래서 모든 수송품은 배로 갈아타야 했다. 이로 인해 뤼데스하임사람들은 많은 운송료를 벌어들였고, 선박운행관련 일을 했다. 또 많은 여행객이 거기서 출발하는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숙박시설이 발달했다.

1803년 제국회의 주요 결정에 따라 마인츠대주교의 라인가우 지배권이 박탈된다. 이에 따라 라인가우는 나사우 공작령에 편입된다. 1816년 4월 4일에 뤼데스하임에 나사우의 행정기관이 설치된다. 1818년 1월 1일에는 도시권이 부여된다.

1867년 나사우 공작력이 프로이센에 편입되면서, 뤼데스하임은 새로 구획된 라인가우군의 소재지가 된다.

1877년 빌헬름 1세 황제가 니더발트뎅크말(게르마니아 여신상)을 만들기시작해 1883년에 완성한다. 이 여신상을 보러 많은 관광객이 몰렸다. 초기에는 당나귀등을 이용해 여신상을 보로 언덕에 올랐으나, 1883년 부터는 증기기관차를 이용한 니더발트 전차가 설치 운행되기 시작한다. 1954년부터는 케이블카가 전차를 대신하게 된다. 기존은 강물을 이용한 운송업 대신에 관광업이 이 도시의 주산업으로 자리잡았다.

1939년에는 뤼데스하임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아이빙엔 주민의 의사에 반해 아이빙엔을 뤼데스하임으로 전격병합한다.

가톨릭 성인력으로 성 카타리아 축일인1944년 11월 25일 교회와 성당이 있던 지역에 대한 폭격으로 200여명이 사망하게 된다. 도시는 이 날을 카타리나절로 정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2차 대전때 구시가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 폭격을 피하고, 전후 신속한 복구로 여행지로서의 명성을 금방 회복하게 된다. 전후 뤼데스하임에 이주자를 위해 여러개의 이주지역이 만들어 진다.

행정구역 변화[편집]

1977년 1월 1일에 아스만하우젠(아울하우젠 포함)과 프레스베르크가 뤼데스하임으로 편입된다. 라인가우군과 운터타우누스군이 라인가우-타우누스으로 통합되면서 군청소재지를 바트 슈발바흐로 넘겨주게 된다.

뤼데스하임은 2002년 중부라인 상부 문화경관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정치[편집]

시의회[편집]

2011년 3월 27일 실시된 기초의회 선거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당 2011 2006 2001
2011년 뤼데스하임 기초의회 선거
 %
50
40
30
20
10
0
41.2%
(−3.6%)
21.4%
(−2.2%)
19.9%
(−3.5%)
13.4%
(+8.3%)
4.1%
(+1.1%)
2006

2011



득표율 의석 득표율 의석 득표율 의석
기민련(CDU) 41.2 13 44.8 14 52.0 19
자유유권자(WIR) 21.4 7 23.6 7
사민당(SPD) 19.9 6 23.4 7 32.3 12
열린녹색명부(Offene Grüne Liste) 13.4 4 5.1 2
자민당(FDP) 4.1 1 3.0 1 15.7 6
100.0 31 100.0 31 100.0 37
투표율(%) 47.7 46.4 49.7

시장[편집]

2007년 9월 30일 실시된 결선투표에서 65.0%를 득표하고 2008년 1월 취임한 기민련의 폴커 모즐러(Volker Mosler, CDU)가 시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는 2007년 선거에서 최초의 직선 시장으로 12년간 재임한 무소속 우도 그륀을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