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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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萬積, ? ~1198년)은 고려 신종 때의 사람으로 당시 집권자이던 최충헌(崔忠獻)의 사노비였다.

이의방 · 정중부의 난 이후 몇 십 년 동안 무신 정권에서는 쿠데타로 그 집권자를 몰아 내고 집권하는 등의 하극상 풍조가 만연했고, 그 중 이의민경주 노비 출신으로 최고집권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풍토에서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면서 천민들을 모아 봉기하려고 하였으나 봉기 모의에 참여했던 노비 ‘순정’의 밀고로 만적의 주도로 봉기에 참여했던 5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체포, 수장되어 일단락 되었다. [1]

만적의 난[편집]

어느 날 만적은 동료인 미조이·연복·성복·소삼·효삼과 함께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주변의 노비들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선동했다.

“정중부의 난 이후로 많은 고관이 천한 출신에서 나왔다. 왕후장상이 처음부터 씨가 있을까 보냐.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왜 우리만 상전의 매질을 당해가며 뼈가 빠지게 일만 해야 하는가!”

노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만적의 말에 힘찬 박수를 보내었다. 그들은 만적을 지도자로 떠받들고 그의 밑에 한 덩어리로 뭉칠 것을 굳게 맹세했다. 만적의 선동에 고무된 노비들은 곧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오려서 ‘정(丁)’자 휘장을 만들어 차며 거사를 약속했다.

“이달 17일에 흥국사에 모두 모여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격구장으로 달려 가, 난을 일으키도록 하자. 우리가 힘을 합해 최충헌과 상전들을 죽이고 또 노비문서를 불태워 이 나라에 천민이 하나도 없게 하면 공경과 장상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노비문서를 불태워 고려에 천민을 없애버리자는 흥국사의 거사계획은 허망하게 수포로 돌아갔다. 수천 명에 달하는 노비들이 모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정작 거사 일에 모인 노비들은 몇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거사가 어렵다고 판단한 만적은 다시 거사 일을 21일로 옮기고 보제사에서 다시 거사하기로 했다. 만적은 명령을 내려 모든 노비 동지들이 이 계획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아무쪼록 기밀 유지에 철저함를 기하도록 했다.

고려사」에 전하는 만적의 봉기 전말에서 보듯이 이의방, 정중부의 무인들로 시작된 ‘무신정권 시대’로 통칭되는 시대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물게 가장 역동적인 정변의 시기다. 정변을 일으킨 무신이 왕의 여자를 부인으로 삼는가하면, 천민계급이 국가의 최고 통치자 신분에 오르는 등 조선시대에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변혁기였다.[1][2]

경과[편집]

만적은 고려 때 최충헌(崔忠獻)의 종으로 1198년 5월 다른 종들과 함께 개경(開京)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公私)의 노예들을 모아놓고 난을 일으킬 것을 제의했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노예 출신으로 벼슬한 사람이 많은 사실을 지적, 궐기해야 한다고 선동, 모였던 노예들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황지(黃紙) 수천 장을 오려 丁자 모양을 만들어 표지(標識)로 한 다음 5월 17일 흥국사(興國寺) 뜰에 모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뒤이어 각각 자기 주인을 죽인 후 노비(奴婢)의 문적(文籍)을 불살라 없애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거사일에 모인 수가 몇백 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다시 21일에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했으나, 동지 중에 밀고자가 생겨 백여 명의 노예들과 함께 붙잡혀 강물에 던져져 사망했다. [1]

의의[편집]

1170년 무인정권과 함께 촉발된 농민과 천민들의 항쟁은 삼별초 항쟁을 끝으로 무인정권이 완전히 무너지는 1270년까지 약 1세기라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하였다. 만적의 난이 좌절된 지 5년 뒤인 1203년(신종 6년)에도 개경 사노들이 산에 모여 노비해방을 꿈꾸며 전투 연습까지 하다 들키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서도 만적의 난과 같이 사노 50명이 잡혀 수장되었다.

만적의 봉기시도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이라는 데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 보아 노예 스스로 해방 운동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만적은 이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을 짰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노예 해방운동은 최충헌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 또 고려 사회에도 충격적인 영향을 끼쳤다. [1]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인명사전》, 만적(萬積), 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집, 민중서관(2002년)
  2. 《문헌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만적의 난 ’ 참조

참고 자료[편집]

  •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만적 노비해방운동의 선구자, 이이화 저, 김영사(2008년, 179~187p)

바깥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