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의 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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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의 입락(端平-入洛)은 1234년(단평 원년) 남송몽골 제국이 하남 지방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벌인 분쟁이다. 북송 시대의 수도였던 개봉낙양남경인 삼경을 회복하기 위해 남송이 하남에 출병했지만, 몽골의 반격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손을 잡았던 두 나라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적대 관계가 되었고, 곧 40년에 걸친 오랜 전쟁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전개[편집]

송나라가 몽골과 처음 접촉한 것은 1214년(가정 7년)이지만, 왕래가 있었을 뿐 깊은 관계는 없었다.[1] 칭기즈 칸은 서방 원정을 끝내고 금나라서하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이때 몽골군의 일부가 송나라의 국경을 침범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227년(보경 3년) 봄에 송나라의 서북 변경을 침입한 몽골군은 사천 일대를 약탈하고 무력 시위를 벌였는데,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일단 철수했다.[2] 이후 몽골은 서하를 무너뜨리면서 금나라의 새 수도 개봉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지만, 금나라 군대가 집결해 있던 동관은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사망하기 전에 송나라는 금나라와 대대로 적대적이었으니, 송나라에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한다면 반드시 승낙할 것이라는 유조를 남겼다.[3]

몽골의 새로운 대칸인 오고타이 칸은 1230년(소정 3년)부터 금나라 공격을 재개했다. 오고타이는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진격했는데 중군은 자신이 지휘하고 좌익군은 산동 방면으로, 우익군은 섬서 방면으로 금나라 공략에 나섰다. 우익군을 지휘한 툴루이 칸은 칭기즈 칸이 남긴 유조대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1231년(소정 4년) 7월, 몽골 사신이 면주에서 송나라 관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5] 이때 사천제치사는 몽골의 불만을 가라앉히고자 몽골군에게 군량을 제공하고, 길을 안내해주는 등의 편의를 제공했다. 송나라의 도움으로 한수를 건넌 몽골군은 등주에 도달했고, 이듬해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의 주력군을 괴멸시킨 뒤 개봉을 포위했다.[6]

1233년(소정 6년) 6월, 몽골은 금나라 협공을 위한 맹약을 맺을 것과 금나라에게 제공하던 세공을 앞으로 몽골에게 제공해 줄 것을 의논하기 위해 왕즙양양에 파견했다.[7] 왕즙으로부터 얘기를 전달받은 경호제치사 사숭지는 즉시 송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송나라 조정에선 해상의 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이견이 있었지만, 오랜 적인 금나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몽골과 맹약을 맺기로 했다.[8][9] 같은 해 8월엔 금나라도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순망치한을 주장하며 몽골에 대항하여 자신들과 동맹을 맺을 것을 애원했으나, 이미 몽골과 동맹을 맺기로 방침을 굳힌 송나라는 이를 일축했다.[10] 10월, 강릉부도통 맹공이 이끄는 2만 명의 송나라군이 북상하여 금 애종이 피난 중이던 채주를 몽골군과 함께 포위했다.[11]

1234년(단평 원년) 정월, 채주가 함락되고 애종이 자살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했다. 맹공은 금 애종의 유골을 임안에 가져와 태묘에 바쳐 국치를 설욕했다.[12]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과거 송나라의 발상지였으며, 금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하남의 영유권을 둘러싼 문제가 부상했다. 3월, 남송 이종은 태상시(太常寺)의 관리를 낙양에 보내 북송 시대의 황릉을 참배하게 했다. 때마침 몽골군이 하남과 섬서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참배를 망설이기도 했지만, 맹공이 호위하여 10일 만에 신속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다.[13][14] 이 무렵, 송나라의 실권자 사미원이 사망해 친정을 시작한 이종은 재상 정청지의 도움을 받아 정국을 일신하고, 북벌을 성공시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남 출병을 추진했다. 반대로 사숭지와 교행간 등은 기아로 백성들이 지쳐있고, 하남을 점령해도 방어와 보급 문제로 수비가 어렵다며 회의적인 기류를 보인 대신들도 있었다.[15] 하지만 이종은 황하를 수비하면서 동관에 의지하면 삼경을 탈환할 수 있다고 주장한 회동제치사 조규의 지지를 등에 업고 출병을 결정했다. 6월 12일, 전자재가 회서 병력 1만 명을 지휘해 북벌군의 선봉대를 맡아 합비를 출발했고, 이를 보조하기 위해 조규가 지휘하는 회동 병력 5만 명도 사주숙주를 거쳐 하남에 진입했다.

회수를 건너 북상한 전자재의 선봉대는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은 채 7월 5일엔 개봉에 입성했다. 당시 개봉에는 과거 금나라에서 서면원수로 있던 최립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송나라 군대가 접근 중이란 얘기를 들은 성의 주민들이 최립을 죽이고 항복했다. 하지만 개봉에 입성한 송나라 군대는 실망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번화한 도시를 상상했지만, 실제 개봉은 수비군 600여 명과 주민 1,000여 명이 머무르며 대상국사와 옛 궁전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또한 오랜 전란으로 생각 이상으로 하남 일대가 황폐해져 있었다.[16] 7월 20일엔 조규의 군대가 개봉에 도착했고, 휘하의 병사들에게 5일분의 식량을 지참시켜 낙양 탈환에 나섰다. 8일 만에 낙양은 저항 없이 점령했지만, 식량이 이미 바닥나서 밀가루로 연명하고, 군마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곧 몽골군의 복병이 낙양을 급습하자, 고립무원의 상황에 내몰린 송나라군은 패주했으며, 그 와중에 황하의 제방이 무너져 전체 병력의 8~90%가 사망하는 참담한 피해를 보고 강남으로 귀환했다.[17][18]

북벌군이 소득 없이 귀환하자, 조규와 전자재 등 장교들은 문책을 받아 벼슬이 깎이거나 파면당했다.[19] 12월, 몽골이 왕즙을 임안에 파견하여 맹약을 위반한 것을 비난했다. 송나라는 답례사를 몽골에 보내 삼경을 회복하고자 했던 경위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화의를 성립시키고자 했으나, 몽골은 송나라가 항복할 것을 요구하여 교섭은 결렬됐다.[20][21]

1235년(단평 2년) 6월, 몽골군이 사천・경호・강회 등 세 방면에서 송나라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는 40년에 걸친 전쟁에 돌입했다.[22]

각주[편집]

  1. 건염이래조야잡기』 을집 권19, 韃靼款塞:「嘉定七年正月九日甲戌、夜三鼓、濠州鍾離縣北岸呉團鋪、有三騎渡淮而南、水陸巡檢梁實問所由、三人者出文書一嚢、絹畫地圖一冊、云是韃靼王子成吉思遣來納地請兵…… 因戒邊吏、後有似此者、即驅逐去之、違者從軍法、且上其事於朝」
  2. 『가재잡고』 권25, 丁亥紀蜀百韻
  3. 원사』 권1, 太祖紀:「[二十二年七月己丑] 崩于薩里川哈老徒之行宮。臨崩謂左右曰:『金精兵在潼關、南據連山、北限大河、難以遽破。若假道于宋、宋、金世讎、必能許我、則下兵唐、鄧、直擣大梁。金急、必徴兵潼關。然以數萬之衆、千里赴援、人馬疲弊、雖至弗能戰、破之必矣』」
  4. 송사기사본말』 권90, 蒙古取汴:「[紹定四年七月] 速不罕至沔州青野原、統制張宣殺之」
  5. 『원사』 권115, 睿宗傳:「遣搠不罕詣宋假道、且約合兵。宋殺使者、拖雷大怒曰:『彼昔遣苟夢玉來通好、遽自食言背盟乎!』 乃分兵攻宋諸城堡、長驅入漢中、進襲四川、陷閬州、過南部而還」
  6. 『원사』 권121, 按竺邇傳:「宋制置使桂如淵守興元。按竺邇假道於如淵曰:『宋讎金久矣、何不從我兵鋒、一洗國恥。今欲假道南鄭,由金、洋達唐、鄧、會大兵以滅金、豈獨為吾之利? 亦宋之利也』。如淵度我軍壓境、勢不徒還、遂遣人導我師由武休關東抵鄧州、西破小關、金人大駭、謂我軍自天而下。……我師不與戰、直趣鈞州、與親王按赤台等兵合、陣三峯山下…… 按竺邇先率所部精兵、迎擊於前、諸軍乘之、金師敗績」
  7. 사고전서총목제요』 권52, 使北日錄一卷:「理宗紹定六年癸巳、史嵩之為京湖制置使、與蒙古會兵攻金。會蒙古遣王檝來通好、因假伸之朝奉大夫、京湖制置使参議官往使。以是歳六月、偕王檝自襄陽啓行」
  8. 속자치통감』 권167:「[紹定六年十一月丙寅] 權工部侍郎趙范入見……帝問蒙古議和事、范曰:『為羈縻之策則可。宣和海上之盟、其初堅如金石、緣倚之太重、備之不至、迄以取禍、此近事之可鑒者』」
  9. 『속자치통감』 권167:「[紹定六年十一月己巳] 趙葵入見、帝問曰:『金與蒙古交爭、和議如何?』 葵對曰:『今邊事未強、軍政未備、且與之和。一年無警、當作兩年預備、若根本既壯、彼或背盟、足可禦敵……』 帝曰:『卿規模甚遠、其殫意為朕展布』」
  10. 금사』 권18, 哀宗紀下:「[天興二年八月] 假蔡州都軍致仕内族阿虎帶同僉大睦親府事、使宋借糧、入辭、上諭之曰:『……大元滅國四十、以及西夏、夏亡必及於我。我亡必乃于宋。脣亡歯寒、自然之理。若與我連和、所以為我者亦為彼也。卿其以此曉之』。至宋、宋不許」
  11. 『송사기사본말』 권91, 會蒙古兵滅金:「[紹定六年十月] 史嵩之命孟珙、江海帥師二萬、運米三十萬石、赴蒙古之約」
  12. 송사』 권41, 理宗紀一:「[端平元年四月丙戌] 以滅金獲其主完顔守緒遺骨告太廟、其玉寶、法物並俘囚張天綱、完顔好海等命有司審實以聞」
  13. 『송사』 권41, 理宗紀一:「[端平元年三月辛酉] 詔遣太常寺主簿朱揚祖、閣門祗候林拓詣洛陽省謁八陵」
  14. 『속자치통감』 권167:「[端平元年八月甲戌] 朱揚祖、林拓以『八陵圖』上進。帝問諸陵相去幾何及陵前澗水新復、揚祖悉以對。帝忍涕太息久之。初、揚祖等行至襄陽、會諜報蒙古哨騎已及孟津、陝府、潼關、河南皆增屯戍、設伏兵、又聞淮閫刻日進師、衆畏不前。孟珙曰:『淮東之師、由淮西溯汴、非旬餘不達。吾選精騎疾馳、不十日可竣事。逮師至東京、吾已歸矣』。於是珙與二使晝夜兼行、至陵下、奉宣禦表、成禮而還」
  15. 『송사기사본말』 권92, 三京之復:端平元年六月條
  16. 제동야어』 권5, 端平入洛:「[端平元年甲午]……六月十二日、離合肥。十八日、渡寿州。二十一日、抵蒙城縣、縣有二城相連背、渦爲固、城中空無所有、僅存傷殘之民數十而已、沿途茂草長林、白骨相望、蝱蠅撲面、杳無人踪。……七月二日、抵東京二十里箚寨、猶有居人遺跡及桑棗園。初五日、整兵入城、行省李伯淵先期以文書來降、願與谷用安、范用吉等結約、至是乃殺所立大王崔立、率父老出迎、見兵六七百人、荊棘遺骸、交午道路、止存民居千餘家、故宮及相國寺佛閣不動而已」
  17. 『송사기사본말』 권92, 三京之復:「[端平元年八月] 蒙古兵至洛陽城下立寨、徐敏子與戰、勝負相當。士卒乏糧、因殺馬而食、敏子等不能留、乃班師。趙葵、全子才在汴京、以史嵩之不致饋、糧用不繼。所復州縣、率皆空城、無兵食可因。蒙古兵又決黄河寸金澱之水以灌官軍、官軍多溺死、遂皆引師南還」
  18. 『제동야어』 권5, 端平入洛:「……[七月]二十日、趙文仲以淮東之師五萬、由泗宿至汴、與子才之軍㑹焉…… 於是敏子領軍、以二十一日啓行、且令諸軍以五日糧爲七日食、蓋懼餉饋或稽故也。……二十八日、遂入洛城。二十九日、軍食已盡、乃採蒿和麵作餅而食之…… 八月一日、北軍已有近城下寨者、且士卒飢甚、遂殺馬而食…… 初二日、黎明、北軍以團牌擁進、接戰…… 北軍既知我遁、縱兵尾擊、死傷者十八九」
  19. 『송사기사본말』 권92, 三京之復:「[端平元年九月壬寅] 趙範以入洛之師敗績、上表劾趙葵、全子才輕遣偏師復西京、趙楷、劉子澄参贊失計、師退無律、致後陣喪敗。詔:趙葵削一秩、措置河南、京東營田邊備。全子才削一秩、措置唐、鄧、息州營田邊備。劉子澄、趙楷並削秩放罷」
  20. 『속자치통감』 권167:「[端平元年十二月] 己卯、蒙古遣王檝來責敗盟。辛卯、遣鄒伸之、李復禮、喬仕安、劉溥報謝」
  21. 『서산문집』 권14, 乙未 (端平二年) 十一月二十四日:「竊聞韃之取西夏、取金國也、皆先之以議和之使、而隨之以侵伐之師、未有不墮其術中者…… 先之以議和之使、隨之以攻伐之兵、彼嘗施之二國矣、又安知不欲施於我耶? 是猶不可以不備也」
  22. 『송사기사본말』 권93, 蒙古連兵:「[端平二年六月] 蒙古主命子闊端將塔海等侵蜀、特穆徳克、張柔等侵漢、口溫不花及察罕等侵江、淮」

참고 문헌[편집]

  • 『송사』
  • 『원사』
  • 『금사』
  • 『송사기사본말』
  • 『건염이래조야잡기』
  • 『속자치통감』
  • 『제동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