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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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7일 (토) 12:15 판

단병호(段炳浩, 1949년 7월 13일 포항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노동운동가이다.

생애

포항에서 자란 단병호는 노동운동가가 되기 전에는 스스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한 이후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하다가 1980년에 서울로 올라왔다.

젊은 시절의 단병호는 민주공화당의 청년당원이었으며, 박정희를 존경했다. 또한 1980년 광주항쟁 당시에는 "광주 사람들 다 때려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어린 시절의 친구로부터 진상을 전해듣고 나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1982년에는 동아건설에 입사하였으며, 1986년 연말 상여금 문제로 처음으로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공장 주임이었는데, 파업을 말리기는커녕, 이를 동조했다는 이유로 회사 측의 퇴사 요구를 받았다. 1987년 7월에는 이러한 문제인식을 발전시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가속화되면서 그는 1988년 지역업종 노동조합 전국회의 의장을 거쳐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위원장이 되어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노협 결성 당시 한 번, 위원장직 수행 당시 두 번 구속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6시40분쯤 외국어대 재학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1]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1]

전노협 위원장을 역임하던 단병호는 1995년에는 아직 불법 상태였던 민주노총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1996년에는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 1998년에는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의 위원장을 지냈다.

1998년에는 1997년의 민주노동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가 1999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같은 해 8월 29일에 (1999년 2월 합법화 된) 민주노총 제3기 위원장에 당선되어 2001년까지 활동하였다.

이후 민주노총 활동 및 민주노동당 지지활동을 하다가,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종북주의 파동 이후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다고 하면서, 2008년 3월 20일 당을 탈당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탈당한 노회찬, 심상정과 달리 진보신당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가족

  •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장녀 단정려는 사법시험 합격 후 검사를 지원했고, 2009년 창원지검 검사로 임용됐다.

같이 보기

주석

  1. 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천주교인권위 1990년 10월 5일자

참고 문헌

  • 편집부 엮음, 《시사인물사전 2》 pp 64~71, 인물과사상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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