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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왕세자를 호종하였으며 함경도에 피난하였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을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왕세자를 호종하였으며 함경도에 피난하였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을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저서에 《계사일록》이 있다.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저서에 《계사일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양성군|양성]] 현감 [[윤경원]]이 그의 아들이다.


[[분류:조선의 문신]]
[[분류:조선의 문신]]

2009년 10월 24일 (토) 18:21 판

윤탁연(尹卓然, 1538년 ~ 1594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상중, 호는 중호, 시호는 헌민, 본관은 칠원이다.

우봉 현령 윤이의 아들로 1558년 사미시에 합격하고 1559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 1568년 전적, 사간원의 정언을 지내고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고《명종 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574년에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동래 부사, 상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580년 좌승지와 도승지, 예조참판을 지내고 1582년 영남 지방에 대흉년이 들자 경상도관찰사로 특채되었고 1583년 형조에서 죄인을 다스릴 때 임신한 여자를 장형에 처하여 낙태치사하게 한 책임으로 좌천되었다.

1585년 경기도관찰사에 올랐으며, 이어 세 차례의 형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칠계군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왕세자를 호종하였으며 함경도에 피난하였던 임해군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을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저서에 《계사일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양성 현감 윤경원이 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