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대주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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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는 1475년의 [[피사 대주교]]이다. [[리아리오 가]]와 [[살비아티 가]] ([[교황 식스토 4세]]는 메디치 가를 몰아내고 교황의 은행 계관권을 보상했다) 출신인 그는 결혼을 통해서 [[파치 가]], 메디치, 베토리, 그외 권력을 지닌 가문들과 친척 관계였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살비아티는 인본주의자로서 교육 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를 잃은 후에는 가문을 부흥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직자로소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친 메디치 성향의 자료에서는 살비아티를 교회를 통해 권력쟁취를 추구했던 아첨꾼이자 도박꾼으로 묘사한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는 1474년 피사의 대주교였으며 파치 음모사건의 주동자 명이었다. 리아리오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의 혈족이기도 하고, 파치, 메디치, 베토리, 권력가와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살비아티는 인본주의자로서 교육 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를 잃은 후에는 가문을 부흥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직자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친 메디치 성향의 자료에 기록된 살비아티에 대한 평가를 보면 교회를 통해 권력쟁취를 추구했던 아첨꾼이자 도박꾼으로 묘사하고 있다.


1464년, 살비아티는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훗날 교황 식스토 4세-와 그의 조카들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지롤라모]], [[피에트로 리아리오|피에트로]]와 접촉하기 위해서 스스로 로마로 갔다. 여기서 그는 대주교 임명이라는 수익을 거뒀다.
1464년, 살비아티는 로마로 가서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훗날 교황 식스토 4세)와 그의 조카들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지롤라모]], [[피에트로 리아리오|피에트로]]와 교류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인해 훗날 피사의 대주교에 임명될수 있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는 그의 대주교 임명을 반대했고 그러하여 1478년 그는 [[파치 음모]]에서 [[피렌체 대성당]]에서 [[로렌초 데 메디치|로렌초]], [[줄리아노 데 메디치|줄리아노]]를 암살하기 위해서 그들을 꾀기 위해 그의 조카 [[라파엘레 리아리오]]를 보냈으며, 그의 암살이 일어나게 될 피렌체 대성당에서 열리는 미사에 그를 초대했다. 종이 울리는 동안, 살비아티는 곤팔로니에레인 페트루치를 살해하고 [[시뇨리아 광장]]을 장악하기 위해 [[베키오 궁전]]으로 갔지만, 대성당에서 주요 인물에 대한 살인이 벌어지는 동안, 그는 페트루치에게 체포되어 [[살라 데이 두첸토]]의 창문에서 군중들에게 교수형을 당했다. 피렌체인들에 의한 살비아티의 죽음은 피렌체가 파문과 이어지는 2년간의 교황청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핵심 요소였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그가 피사 대주교로 부임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다. 1478년 봄, [[로렌초 데 메디치|로렌초]], [[줄리아노 데 메디치|줄리아노]]를 암살하기 위해 그의 조카 [[라파엘레 리아리오]]를 보내서, 그들을 피렌체 대성당에서 열리는 미사에 초대했다. 다른 공모자들이 메디치 가문의 형제들을 살해하는 동안에 살비아티는 베키오 궁으로 곤팔로니에레 페트루치를 죽이고 시뇨리아 궁을 장악하여 정권을 탈환하려 시도하였다.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줄리아노는 성당에서 즉사했지만 로렌초는 사건현장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는 페트루치에게 체포되었고 성난 군중에 의해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이 임명한 대주교 프렌체스코 살비아티가 효수당하자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였고 이 일로 인해 2년 피렌체와 전쟁을 하였다.


== 대중 문화 ==
== 대중 문화 ==

2020년 2월 19일 (수) 11:09 판

Francesco Salviati Riario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는 1474년 피사의 대주교였으며 파치 음모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리아리오 가문과 살비아티 가문의 혈족이기도 하고, 파치, 메디치, 베토리, 그 외 권력가와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살비아티는 인본주의자로서 교육 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를 잃은 후에는 가문을 부흥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직자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친 메디치 성향의 자료에 기록된 살비아티에 대한 평가를 보면 교회를 통해 권력쟁취를 추구했던 아첨꾼이자 도박꾼으로 묘사하고 있다.

1464년, 살비아티는 로마로 가서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훗날 교황 식스토 4세)와 그의 조카들인 지롤라모, 피에트로와 교류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인해 훗날 피사의 대주교에 임명될수 있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그가 피사 대주교로 부임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다. 1478년 봄, 로렌초, 줄리아노를 암살하기 위해 그의 조카 라파엘레 리아리오를 보내서, 그들을 피렌체 대성당에서 열리는 미사에 초대했다. 다른 공모자들이 메디치 가문의 형제들을 살해하는 동안에 살비아티는 베키오 궁으로 곤팔로니에레 페트루치를 죽이고 시뇨리아 궁을 장악하여 정권을 탈환하려 시도하였다.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줄리아노는 성당에서 즉사했지만 로렌초는 사건현장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는 페트루치에게 체포되었고 성난 군중에 의해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이 임명한 대주교 프렌체스코 살비아티가 효수당하자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였고 이 일로 인해 2년 피렌체와 전쟁을 하였다.

대중 문화

파치 음모에 가상의 요소들을 포함시킨 《어쌔신 크리드 II》에서 살비아티는 피렌체로 진입하는 파치 군대를 이끌었고, 토스카나 근교의 그의 저택으로 달아났지만, 1479년에 그를 추적한 암살자 에치오 아우디토레 다 피렌체에게 살해당한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