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문정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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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坵, [[1211년]]~[[1278년]])는 [[고려]] 후기 [[문신 (관료)|문신]]이다.<ref>{{서적 인용|저자1=이응백|저자2=김원경|저자3=김선풍|제목=국어국문학자료사전|장=김구|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8714&cid=41708&categoryId=41711|출판사=한국사전연구사|연도=1998}}</ref> [[자 (이름)|자]]는 차산(次山), [[호 (이름)|호]]는 지포(止浦)이다. 1234년(고종 21)부터 1239년(고종 26)까지 [[제주]] [[판관 (벼슬)|판관]]을 맡았다.<ref>{{서적 인용|제목=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장=김구|url=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24811&cid=51955&categoryId=55527|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회}}</ref>
{{여러 문제|
{{문서 등재 기준|날짜=2015-4-23}}
{{출처 필요|날짜=2015-4-23}}
}}
{{저작권}}


== 각주 ==
문정공 문하시중 중서시랑 평장사 참판도사사 태자이사 정당문학 태학사 첨지사.
{{각주}}

자는 차산이며 초명은 백일이시다. 호를 지포로 하시며 부령의 선학동(이에따라 훗날 선은동으로 명칭이 바뀜)에 지지포(대학삼강령의 하나인 지어지선을 깨우치는 곳)를 두어 도의를 강론하셨다.

이규버로부터 나의 문필을 이어 재상이 될자는 오직 이 사람이시다. 라고 평해졌으며 무산(무산의 봉우리가 12개이므로 연령 12세를 의미한다)에 진사가 되셨기에 대과 역시 장원을 의심하는 이가 눈 앞에서는 있지를 않았으나 지공거 김양경이 자신의 의발을 전하기 위해 자신위 급제 등위인 갑과 2위로 천거하여 화응 범질의 고사로 축사를 대신하였기에, 세대가 전해지며 저 고령의 숙주와 빈한하던 사가정마저 이 용사를 가지고 스스로의 급제 등수를 얘기하며 흠연해 졌다고 한다.

국찬으로 지어진 동문선에 공의 절구 고시 계 발 표 전 과 같은 초려지문이 실려있으며 여조 때 최자는 김공께 '진효공 효함에 거하여 사해를 병탄하다'라는 제시문을 받어 들고서 그 자식에게 문장의 준칙이라 말하여 사은하였던 일화는 모두 고려사의 열전과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있다. 유경 이장용이 공을 이부로 공빙하였을 때 이미 국서를 관장하였기에 훗날 대사성이 될 때에도 '평장사'라고 숭칭되어 또 이규버의 찬미하는 말에 잇어서 '급제 김공, 학유 최해가 나라의 문장가로 족하다' 불리었다.

<<전의발계>>는 지금까지도 변려팔고 중 [기린의 뿔] [대붕의 나래] 와 같이 칭송된다.

특히 역적 우봉의 최충헌의 자식 최이가 공의 천자를 맞이하여 굽어 모셨다고 하니 왜 제주에까지 돌문화의 은인이라는 미담이 서려있는가 고찰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접국에서 최초로 통문관을 두어 외교의 폐해를 없앨 뜻을 제창하였으며 몽노의 제국은 공의 문장 하나로 제 부당한 요구를 철회하고 양(제후의 예에 해당한다)을 선물하는 어여쁜 일을 해내기도 하였다.

동시대 안유와 위도의교 하셨다고 한다.

왕씨 4명의 실록이 공과 공의 문하에서 쓰여진 것이라하며 연경의 왕악 같은 자 역시 공의 문채를 흠모하였다.

천하인의 숭앙하는 마음이 세워져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도동서원이 창건된다.


{{토막글|한국사}}
[[분류:1211년 태어남]]
[[분류:1278년 죽음]]
[[분류:고려 사람]]
[[분류:고려 사람]]

2015년 12월 3일 (목) 18:30 판

김구(金坵, 1211년~1278년)는 고려 후기 문신이다.[1] 는 차산(次山), 는 지포(止浦)이다. 1234년(고종 21)부터 1239년(고종 26)까지 제주 판관을 맡았다.[2]

각주

  1.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1998). 〈김구〉.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2. 〈김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