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다의 자장가
타케다의 자장가(일본어:
그 유래는 피차별부락에서 전승되던 노래로, 제목은 "자장가"라고 되어 있지만 실체는 아동노동요에 가깝다. 가사도 부락민 출신으로 식모가 되어 주인댁 아기를 돌보느라 학교에 가지도 놀지도 못하는 10세 전후의 소녀의 심정을 한탄한 것이다.[1]
노래의 유래와 확산의 곡절
[편집]1964년 12월[2][3] 또는 1965년 1월, 동경에술좌가 공연한 노연(労演)주최 무대 작품으로 스미이 스에의 『다리 없는 강』을 공연했다. 이 때 오노에 카츠히코가 오오이즈미 카즈토(多泉和人)라는 필명으로 음악을 맡아 주제에 맞는 곡을 사용하려 했다.[4] 그러나 오노에는 자신이 부락차별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하여 일전에 다른 일로 방문한 적이 있던 교토시 후시미구 타케다지구(피차별부락 중 하나)에 소재한 부락해방동맹 합창단 “맨발의 아이”(はだしの子)를 찾아가 한 합창단원의 모친에게 구전받은 노래를 편곡해 사용한 것이 이 곡이다.[5][6] 오노에가 노래를 채록한 곳이 우연히 타케다지구였기에 「타케다의 자장가」로 알려졌으나, 원래 제목도[7] 악보도 없는 노래였다. 편곡 후반에 「런던데리의 노래」 같은 풍부한 음의 확산을 가한 4분의 2박자를 썼는데, 곡을 발표한 후 관서지방의 여러 연구자가 “이 노래는 내가 채보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오노에는 자신에게 노래를 들려준 여성은 그 후 다른 사람 앞에 나선 적이 없으며, 그녀가 들려준 원곡은 발표한 것보다 템포가 빠른 16분음표라고 부정했다.[8]
이것이 합창단의 레파토리가 되면서 포크음악 가수들에게 퍼져나갔고, 그 중 한 사람이 붉은 새의 고토 에츠지로였다.[9] 고토는 관서포크계의 정례콘서트 “오사카 노음예회(大阪労音例会)”에서 오오츠카 타카히코와 타카다 쿄코가 듀엣으로 가창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 노래를 처음 알고 감명을 받았다.[10] 고토는 당시 푸츠에밀(フーツエミール)이라는 악단의 리더였는데, 레퍼토리가 영어곡 뿐인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 곡을 접한 것을 계기로 푸츠에밀을 해산하고[10] 붉은새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11] 붉은새 결성 당시에는 가진 곡이 "Go with Me to That Land"밖에 없었으나, 고토가 「타케다의 자장가」에 진심으로 힘을 주면서 데뷔작으로 싱글레코드를 발매, 결성 7개월 후인 1969년 11월에는 제3회 야마하 라이트 뮤직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장식했다.[11]
포크가수들에게 확산되기 전에 이 노래를 가창하던 합창단 “보리(麦)”에서는 이 노래가 피차별부락의 노래라고 소개했지만, 포크계에 확산될 당시에는 이런 곡절이 알려지지 않았다.[12] 이 노래를 널리 퍼뜨린 붉은새도 처음에는 노래의 유래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제목의 지명도 오이타현 타케다시라고 착각했다.[13] 붉은 새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타케다”가 어디인지 물어도 알지 못해 얼버무려 왔기에, 고토는 고교동창 하시모토 마사키와 함께 1971년 4월부터 노래의 발상지를 찾기 시작했다. 가사에 “눈(雪)”이 있기에 오이타현 타케다시가 기각되고, “잘도 울어”에서 “잘도”를 “よう”로 말하는 것을 보고 관서 방언으로 추측해 교토시 후시미구나 효고현 히카미군 이치시마정 타케다 등지로 추측했다.[14]
탐색이 시작된 지 2개월만에 한 여성에게서 가사의 “재소(在所)”가 교토에서 미해방부락을 가리킨다는 제보를 받았다. 하시모토는 이 제보에 “큰 쐐기가 박힌 것처럼 언동이 멈췄다”고 회고했다. 이후 1970년 출판된 『교토의 민요』(음악지우사)에 이 노래가 교토시 후시미구 타케다의 노래라고 명기된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다.[15] 하시모토의 탐사 결과를 알게 된 고토는 원곡에서 발굴한 “구세의 무밥, 길상의 나물밥, 그리고 타케다의 비빔밥”이라는 가사를 넣어 부르기로 하고, 1971년 9월 마이니치방송의 심야프로에서 처음으로 가창했다. 이후 1971년 12월 발매된 앨범 『스튜디오 라이브』에서 “쿠세의 무밥…”가사를 넣은 버전을 처음으로 수록했다.[16]
1971년 2월 5일 싱글컷으로 발매, A면에 「타케다의 자장가」, B면에 「날개를 주소서」를 수록해 이후 3년간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가사의 내용으로부터 이것이 피차별부락과 관련된 악곡임을 알아차린 방송국에서 자율규제를 가했다.[17][18][19] 당시 인기가 높았던 붉은새도 구체적인 이유를 듣지 못하고 방송국으로부터 “가창곡에서 빼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20] 음반회사들도 동요하면서 채보자가 편곡 저작권을 주장한 문제를 핑계로 녹음을 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사실상 방송금지곡이 되어 들을 기회가 감소했다.[21]
가사
[편집]널리 알려진 버전
[편집]가사 | 발음 | 해석 |
---|---|---|
守りもいやがる 盆から先にゃ |
모리모 이야가루 본카라 사키냐 |
원곡 버전
[편집]가사[22] | 발음 | 해석 |
---|---|---|
この子よう泣く 守りをばいじる |
코노코 요오나쿠 모리오 바이지루 |
각주
[편집]- ↑ 森 2003, 196쪽.
- ↑ 右田 1978, 225쪽.
- ↑ 人権と部落問題 2010, 27쪽.
- ↑ 藤田 2003, 7、9쪽.
- ↑ 藤田 2003, 12쪽.
- ↑ 藤田正 (2000년 5월 10일). “竹田の子守唄 被差別部落の伝承歌とヒット・ソングの間”. 《部落解放 469号》 (解放出版社): p.99.
- ↑ 森 2003, 200–201쪽.
- ↑ 藤田 2003, 15–16쪽.
- ↑ 森 2003, 184쪽.
- ↑ 가 나 藤田 2003, 19–20쪽.
- ↑ 가 나 藤田 2003, 21쪽.
- ↑ 藤田 2003, 29쪽.
- ↑ 森 2003, 178쪽.
- ↑ 藤田 2003, 30–31쪽.
- ↑ 藤田 2003, 32–33쪽.
- ↑ 藤田 2003, 37쪽.
- ↑ “放送「封印」の背景探る なぜ消えた?名曲「竹田の子守唄」”. 《朝日新聞・大阪朝刊》. 2003년 3월 4일. 25면. - 聞蔵iiビジュアルにて閲覧
- ↑ 森 2003, 187–188쪽
- ↑ 森 2003, 190쪽.
- ↑ “二つの「竹田の子守唄」とメッセージ・ソング(4)”. Beats21. 2001년 3월 28일. 2019년 9월 15일에 확인함.
- ↑ 藤田正 (1999년 5월 10일). “東京音楽通信 普通に聴けるようになった「竹田の子守唄」”. 《部落解放 453号》 (解放出版社): pp.54–55.
- ↑ 森達也『放送禁止歌』光文社知恵の森文庫、2003年 198-199頁
- 森達也 (2003). 《放送禁止歌》. 光文社知恵の森文庫. ISBN 978-4334782252.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藤田正 (2003). 《竹田の子守唄 名曲に隠された真実》. 解放出版社. ISBN 978-4759200232.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特集 出版・報道にみる部落問題の現在 『朝日新聞』竹田の子守唄報道に思うこと”. 《人権と部落問題 2010年9月号 第805号》 (部落問題研究所) 62 (10). 2010년 9월 15일.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右田伊佐雄 (1978). 《大阪の民謡》. 柳原書店.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