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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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간(李凌幹, ? ~ 1357년 7월 21일)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생애
[편집]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모셨다.
1320년(충숙왕 7) 원에 있던 충선왕이 환관인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무고로 인해 토번(吐蕃)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호종했으며, 1325년(충숙왕 12) 충선왕이 연경(燕燕)에서 세상을 떠나자 재궁(梓宮)[1]을 모시고 귀국했다.
이듬해 원이 고려에 성(省)을 세우려고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김이(金怡)·전영보(全英甫) 등과 함께 황제에게 주청해 그 논의를 저지시켰으며, 그 공으로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叅理)를 거쳐 1341년(충혜왕 후 2)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었으며, 이듬해 조적(曺頔)의 난 당시 세웠던 공이 가장 컸음을 인정받아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343년(충혜왕 후 4) 충혜왕(忠惠王)이 원에 잡혀가자 언양군(彥陽君) 김륜(金倫)의 제안으로 재상들 사이에서 충혜왕을 용서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이능간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반대했다.
“ | 천자가 왕의 무도(無道)함을 듣고 죄를 주었는데, 만약 글을 올려 논주(論奏)한다면 이는 천자의 명이 그르다고 하는 셈인데, 옳겠는가?[2] | ” |
1348년(충목왕 4) 원에 성절사(聖節使)로 파견되어 충혜왕의 시호를 청했으나, 황제가 윤허하지 않았다.[3]
1352년(공민왕 원년) 공민왕(恭愍王)의 서연관(書筵官) 중 한 명이 되었으며[4], 이후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과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를 거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