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사종
연사종 延嗣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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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66년8월 8일 고려 동북면 함주(咸州) |
사망 | 1434년 5월 8일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
성별 | 남성 |
본관 | 곡산(谷山) |
별칭 | 자 불비(不非) 시호 정후(靖厚) |
경력 |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 |
직업 | 무관, 정치인 |
작위 |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
부모 | 연주(延柱) |
자녀 | 3남 |
연사종(延嗣宗, 1366년 ∼ 1434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불비(不非), 시호는 정후(靖厚)이다. 함경도 함주(咸州) 출신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생애
[편집]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遼東)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장군 진무(掌軍鎭撫)로서 공을 세워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1393년(태조 2) 회군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401년(태종 1) 제2차 왕자의 난 때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정안군(定安君)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1] 이어 상장군(上將軍)·호조 전서(戶曹典書)를 거쳐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다.
1407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겸 우군 총제(右軍摠制)가 되었고,[2] 1410년 동북면 병마 도절제사(東北面兵馬都節制使)가 되었다.[3]
1422년(세종 4)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에 임명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거쳐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였으며, 4월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훈봉되었다.[4]
연사종은 관화(寬和)하고 공검(恭儉)하였다. 일찍이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초래(草萊)의 천박한 재질(材質)로써 과분히 임금의 알아주심을 입어 가장 높은 직위에 이르렀으되, 항상 조심하여 혹 남의 헐뜯음을 당할까 걱정하였으니, 너희들은 이를 경계하여 응견(鷹犬)이나 성색(聲色) 같은 것을 일체 멀리 하라." 하였다.
1434년(세종 16) 5월 8일 졸하자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예장(禮葬)하였다. 시호를 정후(靖厚)라 하니, 너그럽게 즐거워하며 잘 죽음이 정(靖)이요, 사려가 틀림 없는 것이 후(厚)이다.[5]
묘소
[편집]묘는 원래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91년 도시계획 사업으로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로 이장되었다. 2013년 12월 15일 증평군의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편집]- 할아버지 : 연단서(延丹書)
- 아버지 : 연주(延柱)
- 아들 : 연경(延慶)
- 아들 : 연비(延庇)
- 아들 : 연음(延廕)
- 아버지 : 연주(延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