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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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창

모리스 창(영어: Morris Chang, 중국어: 張忠謀, 병음: Zhāng Zhōngmóu 장중머우[*], 한자음: 장충모; 1931년 7월 10일 ~ )은 중화민국의 반도체 엔지니어, 기업인이다. 세계 최초의 파운드리 기업인 중화민국의 TSMC를 1987년 창업했고, 전 회장을 역임했다. 중화민국의 반도체산업을 탄생시킨 장본인 중 한명으로, 중화민국 첨단산업의 대부, 중화민국 반도체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1998년 커먼웰스(Common Wealth) 잡지가 선정한 중화민국의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비즈니스위크의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 50인, 97년 비즈니스위크 `올해의 톱경영자 25인' 등에 선정되었다.[1]

초기 생애[편집]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의 중국은행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국공내전, 중일전쟁 등을 피해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광저우 등 중국 내 6개 도시를 전전하며 학교를 9차례나 옮기다가,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했다.[2] 1949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뒤, 어릴때부터 철학과 인문학에 관심이많고,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완전히 심취해 작가를 꿈꾸었다.[2] 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로 인해 자신의 진로를 엔지니어로 바꾼 뒤, MIT로 편입한다. MIT에서 기계공학 학사 (1952년), 석사 (1953년) 학위를 받았다.[3]

미국 반도체 기업 재직[편집]

석사 졸업 후에는 포드자동차 입사시험에 합격했고 이곳에 가기를 희망하였으나, 더 높은 급여를 약속한 전력공급장치 제조사 실바니아 일렉트로룩스에 취직해 3년 간 일하였다.[2][3] 1958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로 이직하여, 20년간 근무하며 1972년 반도체 부문 부사장, 숙적 IBM을 2위로 밀어낸 공고를 인정받아 1978년 그룹 전체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이는 당시 글로벌 기업에서 근무하던 중국인 중 최고위직이었다.[2] TI에 재직 중 회사의 지원 하에, 스탠퍼드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I)로 이적하여, 최고운영책임자(COO)로서 연구개발(R&D)을 담당했다.

TSMC 창립[편집]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대만산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직 제안을 받고, 1985년 중화민국으로 옮겼다. 당시 중화민국은 경제 성장 중 1979년 터진 2차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 위기를 맞은 직후였다.[2] 이후 그는 중화민국의 산업 구조가 팹리스 업체로부터 제조를 위탁받아 생산을 전담하는 파운드리 사업이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4]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87년 2월 56세의 나이에 TSMC(타이완반도체제조회사)를 창업했다. TSMC의 창립 연원에 대한 또 다른 설명으로는 중화민국 정부가 반도체 생산 공기업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이끌 인재로 모리스 창을 낙점했다는 설명도 존재한다.[3] 여하튼 이후 브로드컴, 마벨, 엔비디아 등의 업체가 TSMC에 반도체 주문 제작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2019년 기준 TSMC는 애플, 퀄컴 등 대기업을 포함한 499개 고객사로부터 10,761개의 서로 다른 제품을 생산했으며, 당해년도 매출액은 1조 699억 8,545만 중화민국달러 (약 43조 8,052억원)이다.[5]

창업 당시 자본금 2억 2,000만달러는 정부와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절반씩 유치했다. 이후 TSMC는 1990년대 민영화가 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의 현재 지분은 (국가개발기금 등) 6.4%이다.[3] 2017년 5월 TSMC타이완 증권거래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모리스 창 본인과 가족들이 회사의 지분 0.5%를 보유하고 있다.[6]

1989년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과 중화민국에서 가진 만남에서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2017년 닛케이아시안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그에 따르면, 이는 이 회장이 중화민국이 자체 칩 기술을 발전시키거나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7]

은퇴와 복귀[편집]

2005년 74세에 고령을 이유로 은퇴했다. 하지만 2009년 금융 위기로 인해 매출이 급락하자 다시 회사에 복직했다. 복귀 이후 해고직원 복귀 및 투자 확대를 실시했다. 15억 달러(약 1조 8,480억원)로 줄였던 연간 투자 규모를 2개월 만에 19억달러로 늘려 잡았다. 2010년 1월에는 TSMC 사상 최대 규모인 48억달러 상당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TSMC는 2009년부터 매년 약 100억 달러를 들여 첨단 시설을 신설했고, 연구 개발 비중도 매출의 8%로 높였다. 2019년에도 이 비중을 유지하며 914억 1,900만 대만달러(3조 7,408억원)를 연구개발에 투자했다.[8]

그의 투자 확대 전략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2010년 TSMC 매출액은 전년 대비 41.9% 늘어난 4,195억 대만달러(17조 1,659억원)를 기록했다.[8] 이후 2018년 87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2018년에는 차이잉원 총통에 의해 APEC 중화 타이베이 대표로 임명되었다.

각주[편집]

  1. 정호선 (2000년 2월 6일). “[CEO 포커스] 대만반도체제조회사 모리스 창 회장”. 《매일경제》.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이재호 (2018년 6월 8일). “[Who?]셰익스피어 사랑한 문학청년, 대만 경제 구세주가 되다”. 《아주경제》 (베이징). 
  3. 강일용 (2017년 10월 16일). “[IT CEO 열전] 조국을 위해 돌아온 대만 반도체 산업의 아버지, 모리스 창”. 《IT동아》. 2017년 12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4월 24일에 확인함. 
  4. 이민아; 하지은 (2018년 11월 26일). “이 회사가 기침하면 전 세계 IT업계가 벌벌 떤다 : 대만 증시 시총 1위 반도체기업 TSMC 가보니”. 《이코노미조선》. 2022년 4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4월 23일에 확인함. 
  5. 김성은 (2020년 4월 24일). “56세 창업·87세 은퇴…'삼성도 안 부럽다' 반도체따거 : [MT리포트]부동의 파운드리 1위 TSMC…삼성을 '추격자'로 만든 힘”. 《머니투데이》. 2020년 4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4월 23일에 확인함. 
  6. 방성훈 (2017년 7월 13일). “애플 덕분에 '늦깎이' 억만장자 된 모리스 창 TSMC 회장”. 《이데일리》.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7. 배옥진 (2017년 11월 5일). “모리스 창 TSMC 회장 "이건희 회장이 영입 제안했었다". 《전자신문》.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8. 김성은; 김수현 (2020년 4월 25일). “대만 반도체의 아버지, 33년 신화 쓰기까지…”.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