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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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5000NG/FAB-5000 M54
ФАБ-5000НГ/ФАБ-5000 М54
종류 항공 폭탄
국가 소련의 기 소련
역사
사용년도 1943년
사용국가 소련의 기 소련, 러시아의 기 러시아
사용된 전쟁 독소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개발 니손 일리치 겔페린
개발년도 1942
생산 불명
생산년도 1943~1945(FAB-5000NG), 불명이나 냉전기간(M54,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이라크군의 사용이 주장됨)
제원
중량 3250 kg(탄두), 5000 kg(전체)
길이 3107 mm
지름 642 mm

FAB-5000독소전쟁 도중 소련이 개발한 광역 지표파괴용 단일탄두 폭탄이다. 당시 소련이 만든 것 중 가장 거대하고 육중한 항공폭탄이었다.

대전기형의 이름 뒤에 붙은 NG는 개발자 니손 겔페린(니손 일리치 겔페린)의 이니셜이다.

역사[편집]

첫 개발의 시작은 1942년경 소련 화학자 니손 일리치 겔페린에 의해서였다. 제작 과정에서 당국은 주조강과 알루미늄의 사용을 줄이라고 지시했는데, 겔페린의 설계안에서는 전체 비중의 고작 35%만이 금속 외피였고, 나머지는 작약으로 채워져 있었다.

첫 실험에서는 무인화 개조된 DB-3 장거리 쌍발 중형 폭격기에 장착하여, 비행 폭탄, 즉 일종의 순항미사일처럼 만들어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불만족스러웠고, 따라서 통상 항공폭탄으로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그나마 유일하게 장착이 가능했던 Pe-8에 이 폭탄을 장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나머지, 이것을 장착할 경우 Pe-8의 폭탄창 문은 반정도 열려야만 했다고 한다.

이후 이어진 실험에서는 개선되어 나갔는데, 최종 버전에서는 6개의 충격 신관이 장착되었다. 그 위력은 당시로선 참으로 대단해서, 탄흔지 직경만도 20미터에 그 깊이는 9미터에 육박했다.

실전[편집]

첫 실전은 43년도에 있었는데, 쾨니히스베르크의 한 해안요새가 이 폭격을 얻어맞았다. 충격파는 5,800 미터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한 Pe-8을 뒤흔들 정도로 멀리, 강력하게 퍼졌다.

이후에는 43년 6월 4일, 7월 3일, 19일에 오렐의 화물철도역을 폭파하는 작전에도 투입되었는데, 6월 4일에 1발, 7월 3일에 2발이 쓰여 각각 연료 저장고와 철길을 부쉈고, 7월 12일에 진격중이던 독일군을 이걸로 두번이나 폭격한 후 아군 오사 위험이 높아져 다음 전술적 사용은 중단되었고, 쿠르스크 전투가 한창이던 19일 작전에서 두 대의 Pe-8이 투하한 이 폭탄이 100 미터가 넘는 철길 구획을 산산조각 내놨으며, 동시에 일대에 있던 독일군 철도차량들 상당수를 파괴했다.

소련에서는 1943년 5월 26일 게슈타포와 벨라루스인 보조경찰(친나치 경찰)이 장악한 모길레프의 어느 건물을 이걸로 파괴했다고도 주장했는데,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1944년 핀란드에 대한 대공습 당시엔 FAB-5000 두발이 헬싱키에 투하되었다. 소련측 주장으로는 철도정비창과 케이블 공장을 파괴하였다고 한다.

며칠 뒤엔 대전기 모델 중 최후의 한 발이 카메네츠-포돌스키 포위 작전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 브라일리우 역에 투하되어, 며칠간 일대의 모든 철도운행을 중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