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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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기(韓謝奇, 생몰년 미상)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한악(韓渥)의 아버지이다.

생애[편집]

음서로 벼슬을 시작한 듯하다.

1275년(충렬왕 원년) 왕이 새로 뚤루게(禿魯花)[1]를 정하고, 이들에게 3등급을 특진시킨 다음 직급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 한사기는 2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8품으로 특진되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1279년(충렬왕 5) 김흔(金忻)·원정(元貞)·박원굉(朴元浤)·허평(許評)·홍순(洪順)·설지충(薛之冲)·이우(李瑀)·김심(金深) 등 24인과 함께 3등급을 뛰어오른 관직을 제수받고 원에 뚤루게로 갔는데[2], 한사기는 이 때 가족을 데리고 원에 갔다.[3]

같은 해 본국에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4], 이후 총랑(摠郞)을 거쳐 관직이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

사후에 아들 한영(韓永)이 원에서 하남부총관(河南府摠管)까지 지내며 부귀를 누리자,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고양현후(高陽縣侯)에 추증되었다.[3]

가족 관계[편집]

  • 증조 - 한희유(韓希愈)[5] : 검교신호위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행의장부별장(行儀仗府別將)
    • 조부 - 한광윤(韓光胤)[5] : 예빈경(禮賓卿), 증(贈)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
      • 아버지 - 한강(韓康, 1228년 ~ 1303년)[5] :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 증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고양현백(高陽縣伯)[6], 문혜공(文惠公)
        • 어머니 -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 임전우(任全祐)의 딸[5]
          • 동생 - 한사겸(韓謝謙) : 초명 한수연(韓守延), 직사관(直史館)
          • 동생 - 한보(韓譜)
          • 첫째부인 - 도첨의중찬·상호군(上護軍)·판전리사사 채인규(蔡仁揆, 1230년 ~ 1303년)의 차녀[7]
          • 둘째부인 - 정씨(鄭氏)[3]
            • 장남[8] - 한악(韓渥) :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사숙공(思肅公), 충혜왕(忠惠王)의 배향공신
            • 차남 - 한영(韓永 1285년 ~ 1348년) : 원나라 하남부총관(河南府摠管)
            • 딸 - 여산 송운(宋惲)광정원윤(匡靖元尹), 子 - 송선(宋璿)태종비(太宗妃)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조(外祖)(여산송씨족보)

각주[편집]

  1. 몽골어로 인질을 의미한다. 고려에서는 인질로 보낸 왕자와 고관(高官)의 자제를 가리키는 일이 많았다.
  2. 《고려사》 충렬왕세가
  3. 이곡(李穀), 《한영 행장》
  4. 《고려열조등과록》
  5. 《한강 준호구》
  6. 원에서 추증한 관직이다.
  7. 최원중(崔元中), 『채인규 묘지명』
  8. 《고려사》 한강전에는 한사기의 아들을 언급한 부분에서 한영의 이름이 먼저 나와 한영이 장남인 듯 기술하고 있으나, 오늘날 청주 한씨 족보에서는 한악을 장남으로 기록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 한악은 1310년(충선왕 2) 우대언(右代言)에 임명되었는데, 한영의 동생일 경우 아무리 빨라도 1286년(충렬왕 12) 생이 된다. 즉, 겨우 20대에 정3품 관직을 지낸 셈이 되니 사실로 믿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