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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편집]

1928년에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안창섭 옹의 여섯째 막내 아들로 태어남첫째 형수와 둘째 형수께서 업어 키우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형제간의 연령 터울이 매우 컸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원 대 부호의 집안으로 독립 된 쌀 창고가 2개가 있었으며 구황작물을 모아두는 창고도 별도로 2개가 있었고, 별도의 건어물을 모아둔 창고가 1개가 있었다 했다.

제일 맏형은 6.25전쟁 전 까지 사리원역의 역장으로 근무를 했고, 둘째 형님께서는 황해도 안악에서 가축병원 원장을 하고 있었으며 전쟁 발발 무렵 구월산에서 유격대로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전을 치뤘었다

전란으로 소식이 끊겨 동향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을 통해서 물어물어 들은바 얘기로는 구월산 전투에서 대원들과 함께 전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다.

세째 형님은 농기계를 제작하는 공장을 운영하셨다 했고 몇번째 형님인지는 기억 못하겠으나 형제분들중에서도 인물이 너무 출중해서 고향에서 결혼 하실때 혼기찬 여성들이 많이들 울었다고도 했고,

뉴욕으로 이민가 사시는 여든을 넘으신 친척분들의 말씀으로는 여섯 형제 중 인물로는 가장 별로였다 하셨으니 다른 형제분들의 인물이 가히 가늠이 된다.

형제 분들 중 위로 누님이 한분 계셨는데 황해도 황주에 있는 과수원에 시집을 가셨으며 그 누님과는 매우 막역했다 하셨다.

일제 시대에 소학교(국민학생) 학생이 시집 간 누님이 보고 싶은 마음에 발도 닿지 않는 어른용 짐 자전거를 타고 어머님의 심부름을 자처하여 사리원에서 황주까지 그 먼길을 왕복을 하셨다 한다.

과수원에 시집 갔었음을 또렷히 기억하시는 것은 누님댁에 가면 매형께서 황주에서 나는 사과를 주셨는데 그 크기가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큼 클 정도로 매우 큰 크기였으며 그 과일 선물을 싣고 다시 먼길을 되돌아 오다 소달구지와 내리막

길에서 조우하면서 크게 넘어지셨는데 아픈것 보다도 누님이 주신 그 큰 사과가 데굴데굴 내리막에서 굴러가던 모습이 오랜 기억속에 남는다 했다.


사리원읍에서 소학교를 다닐때에는 해방 전이라 일본식 교육을 받았는데 워낙 명석한 전도유망한 소년이었으며, 이후 경성(지금의 서울)에 있는 양정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뤘고

졸업식에서는 일본인 교장선생이 일본에서 들여온 금촉으로 된 만년필을 졸업 기념 선물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의 교육편제는 소학교(초등학교 9년제)-중학교(3년제)-대학교(4년제) 이런 편제였으며 사리원에서 소학교를 나와 경성에 있는 사립 양정고등보통학교'(양정중학교)에 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유학을 가실때 증조부께서 서울로 유학간다며 큰절 하고 인사를 나눴는데 앉아계신 방석 밑에서 당시 돈으로 백원을 주셨다 한다.

당시에 기초 단위의 화폐는 환을 썼으며, 초가집을 한채에 삼십원을 주면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니 백원을 가지고 있는것 자체가 엄청난 큰 액수였음을 짐작케 한다.

양정중학교를 졸업을 하고 도일 유학을 희망했으나 해방의 시기로 인한 정세 혼란등 여러가지 이유로 유학을 포기하고 평양시 소재 평양대학교(김일성 대학교) 건축토목과에 입학하게 된다.

재학중 6.25 전란의 전조 시기에 지역내에 인민군 장교가 된 인근 마을 사람이 말을 타고 집으로 와서 인민군 입대를 강요하기도 했다 (과거 국영방송국 유명 아나운서의 친형이 남하하기 전 인민군 대좌 계급장을 달고 찾아옴)

안도현의 모친은 군입대를 일제 시대 징병쯤으로 여기고 막내 아들을 서울의 친척집으로 피난 시켜 홀로 월남을 하도록 종용한다.


서울로 내려 왔으나 이미 서울도 혼란의 시기로 남과북 양쪽이 모두 정치적 격동의 시기였던터라 이내 6.25남침이 발발하여 피난 열차를 타고 남하하여 대구에 도착 몇날 몇일을 굶주린 상황에서 길게 늘어선 줄이 무어냐 물으니 이 줄에 서 있으면 입대할 수 있고

삶은 감자를 얻어 먹을 수 있다는 말에 국군사병 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군에 입대하게 된 계기가 애국심도 국가관도 아닌 며칠을 굶주려 음식냄새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군복을 입게 되었다 했다.

사병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게 되는데 좌향좌 우향우도 모르는 청년들이 대다수였으며 글을 모르는 문맹의 사병들이 다수였다고 했다. 훈련소 상사 교관이 훈련 2주가 채 안되던 때에 이곳에 대학생 출신이 있냐는 물음에 7명 정도가 손을 들었으며, 그중 2명이 장교로 채택되어 광주보병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그중 고려대생 1명과 평양대학교생 1명이 시험을 통과하여 이송되었다 했다.

이시기에 영원히 부모님과 형제를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의 시기가 됐음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전란 중 광주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생사의 고된 훈련(훈련 중 갈증이나서 논의 물을 마시고는 이질에 걸려 강제 퇴교 조치를 당할 뻔 했으나 교관에게 걸리지 않도록 동기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기사회생함 체중이 45키로 정도로 급격히 여의였다함) 을 마치고 육군 수도사단 기계화부대 63연대에 배속되어 첫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병과 선발에서는 건축과 토목에 필수적인 빠른 수학적 계산이 동반되는 박격포 부대를 통솔하게 되는데 수도사단기계화 부대에는 박격포가 유일한 기계화 중화기 무기였으니 당시의 전투력 열세를 재 가늠케 한다.

당시 6.25전쟁에서는 최선봉 부대를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 위주로 편성된 부대들이 있었으며, 그런 부대들은 전투시 가장 최일선에서 적과 맞닥들이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했다.

실예로 서북청년단 출신들이 소속된 부대들이 대부분 자원 및 선발에 의해 최전방에서 교전하는 전쟁사의 내용을 비추어 볼 때 그렇고 수도사단기계화 부대 63연대 대대장 또한 동향의 황해도 출신이었음을 놓고 볼 때 당시의 상황은 어느 부대나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겠다. 첫 전투를 앞 둔 전날 주임상사인 최상사에게 대대장이 건넨 말 한마디로 안도현 중위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첫 전투의 진격 명령을 내리자 마자 안도현 중위는 기절을 하고 참호에 드러눕게 되는데 돌격 명령과 함께 참호 밖으로 뛰어 나오던 안중위의 머리를 발로 차서 기절 시킨 사람은 바로 63연대 11중대 최상사였던 것이다. 전날 밤 황해도 출신의 대대장이 내일 하루만 안중위를 살리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얘기를 전투가 끝날 즈음 듣게 되었다 한다.


안도현 중위는 이후 압록강 진격까지 함께 했으며, 전후 보병 제21사단 63연대 11중대 중대장을 역임하며, 이기자 부대가 창설을 위해 부대 재편성 부대원들을 이끌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 인근 야산에 주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