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치 음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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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치 음모
Congiura dei Pazzi
Bertoldo di giovanni, medaglia della congiura dei pazzi (lorenzo), 1478.JPG
베르톨도 디 조반니 작의 암살 시도를 보여주는 기념 메달(1478년, 뮌헨 뮌헨 레지덴츠)
날짜1478년 4월 26일
위치피렌체 대성당
최초 보고자교황 식스토 4세
지롤라모 리아리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프란체스코 데 파치
참여자조반 바티스타 다 몬테세코
안토니오 마페이
스테파노 다 바뇨네
베르나르도 반디니 바론첼리
야코포 디 포조 브라촐리니
결과실패
사상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 (사망)
프란체스코 노리 (사망)
피해
전체 인원참여자 : 80여명
부상자로렌초 데 메디치
조사
처형
1479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스캐치한 교수형 당하는 공모자 베르나르도 디 반디노 바론첼리

파치가 음모 사건(Congiura dei Pazzi)은 파치 가문이 주도하여 피렌체의 통치가문으로 군림하던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사건이다. 파치가 외에도 살비아티 가문, 리아리오가문, 교황 식스토 4세가 가담하였다.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일요일 미사를 들이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형제 2명에 대한 살해를 감행하였다. 형 로렌초는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남았으나 동생 줄리아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암살과 동시에 살비아티 가문이 페루자에서 데려온 용병들을 이용해 시뇨리아궁을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정권 탈취를 위한 쿠테타는 실패로 끝났고 공모자들의 대부분은 곧 체포되어 성난 군중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파치(Pazzi) 가문 일족들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파치 가문의 명칭과 문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금지 조치를 당했으며 가문 이름이 공공장소에서 지워졌고, 모든 건물들과 길거리에서도 사라졌다. 이번 쿠테타의 실패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입지를 강화해주었다.

메디치 가문과 원수관계에 있던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84)는 이번 반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교황령과 자기 가문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많아던 교황은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서 몰아낸 후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고 하였다.[출처 필요] 주모자 중에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추기경(피사 대주교)이 효수당하자 교황은 이에 격노하였고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고 피렌체와 1478년에서 1480년까지 2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1] 전쟁에서 연패하며 피렌체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로렌초 데 메디치는 필사적인 외교전을 펼쳐서 상황을 반전시켰고 교황과도 표면적이기는 했지만 화해를 하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2]

메디치 가문과 조국 피렌체의 최대위기를 잘 극복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이 사건 이후 권력 장악력을 강화했다. 또한 자신의 차남을 추기경으로 만들어 종교계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도 키워나갔다. 아울러 사건 당시 암살당했던 친동생 줄리아노의 원수도 10년 동안의 끈질긴 노력끝에 갚는 데 성공한다. 사건 주모자 3인 중 한 사람이자 유일한 생존자였던 리아리오 백작을 1488년에 암살을 통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배경[편집]

피렌체의 통치가문[편집]

로렌초는 20세 때인 1469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피렌체의 통치권을 이어 받았다. 가업인 메디치 은행의 자산은 상당히 줄었는데 이는 그의 할아버지가 건축 사업에서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전비와 정치자금 등 지출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때처럼 매수와 정략 결혼으로 이어진 혼맥과 인맥을 이용하여 시의회 대리인들을 움직이는 등 막후정치를 하며 실권을 쥐고 피렌체를 통치하였다. 로렌초의 통치 기간에 피렌체가 번영했지만, 그는 독재자로 군림하였고 피렌체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는 위축되었다. 이로 인해 파치 가문등 경쟁 가문들은 메디치 가문의 지배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교황의 족별주의[편집]

리구리아의 가난한 가문 출신인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는 1471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식스토 4세 (재위 1471~84)로 정한 그는 다른 교황과 마찬가지로, 친인척들을 등용하는 족벌주의 정책을 펼치며 자신의 출신 가문의 번영을 추구했다. 자신의 출신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과 여러 조카들이 있는 리아리오 가문에게 권력과 부를 안겨주려고 노력했다. 교황에 오르고 채 몇 달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조카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미래의 율리오 2세)와 피에트로 리아리오추기경에 서임하고 다른 네 명의 조카들 역시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3]:252[4]:128

로렌초는 공석이 된 피렌체 대주교에 자신의 친 동생인 줄리아노를 임명해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1473년 교황은 자신의 조카 피에트로 리아리오를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러자 메디치 가문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로렌초는 교황의 조카가 피렌체를 군주처럼 군림하며 통치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이용하여 교황이 족벌주의에 대항하며 피에트로 리아리오가 피렌체에서 정치적인 영향력 행사를 방해하였다.

교황의 융자요청을 거부한 메디치[편집]

교황은 성직자가 아니던 조반니 델라 로베레프라에펙투스 우르비로 임명하였고, 그를 우르비노 공작이던 몬테펠트로 가문과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역시 성직자가 아니였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교황의 사생아라는 설이있다.)를 위해 새로운 교황령를 세울 목적으로, 로마냐의 작은 지역인 이몰라(Imola) 매입을 추진했다.[3]:252[4]:128 이를 위해 메디치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에 융자를 요청했으나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가 여러 핑게를 대며 융자를 해주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교황과 메디치 가문은 소원해졌다. 융자를 해주지 않은 이유는 이몰라(Imola)라는 지역이 피렌체와 베네치아 사이의 교역로에 위치해있었기에 로렌초가 구입하고 싶어했던 곳이였기 때문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1473년 5월에 밀라노 공작(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에게 이몰라 매입을 위해 100,000 플로린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몰라 매입에 성공한 교황[편집]

교황은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밀라노 공작의 사생녀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혼인시키는 조건하에 이몰라(Imola)를 40,000 두캇 매입에 성공하였다.[3]:253 자금은 메디치 가문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파치 은행에서 재정 지원을 받았다. 융자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 식스토 4세는 파치 은행에 교황의 수익 관리권을 내주었다. 파치가의 프란체스코는 교황에게 재정지원을 하지 않겠노라고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약속했었는데 약속을 깨고 교황에게 융자를 해주었다. 아무튼 배신을 당했고 메디치가는 큰 고객을 잃어버렸다. 또한 교황은 메디치 은행의 로마지점에 대한 장부를 조사한 후 은행업무에 비리가 있다는 근거없는 의혹을 제기하여 메디치 가문의 명성에 흠집을 내었다.[5] 이 일로 인해 교황과 메디치 가문은 더욱 갈등하게 되었다.

피사 대주교 부임 거부[편집]

교황 식스토 4세는 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이몰라(Imola)의 행정관으로, 프렌체스코 살비아티피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로렌초는 1474년에 다시 공석이 된 피렌체 대주교에 자신의 처남인 리날도 오르시니의 임명을 요청하였으나 교황은 피사 교구와 피렌체를 병합하려고 했다. 그래서 로렌초는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부임하지 못하게 막았다. 피렌체 공화국내의 성직자 임명은 피렌체 수상의 동의를 받기고 약속한 바가 있는 데도 교황이 이를 무시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프렌체스코 살비아티는 3년동안 로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메디치 가문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다.[6] 교황도 분노하며 피렌체 전체에 파문과 성무정지를 내리겠다고 협박을 하였다.[7]

평화 동맹 제안[편집]

로렌초가 북이탈리아의 평화 유지를 위해 밀라노와 베네치아에 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야기할 뻔했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이 동맹의 목표가 자신이라고 오해하며 분노하였기 때문이다. 나폴리 국왕 페란테도 이 동맹의 진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자 심각한 사태가 빚어졌다. 나폴리와 교황은 전통적으로 적대관계를 형성하곤 했는데 나폴리 왕의 사생아와 교황의 조카가 혼인한 후 관계가 좋아져 있었다. 그러던중 이 일로 인해 로렌초를 불신하게 되면서 교황과 나폴리 국왕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졌다.[8]

계획[편집]

삼자 회동[편집]

파치가문이 단독으로 이번 음모를 선동하고 계획한 것은 아니다.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는 살비아티 가문이 가담하였고 메디치 가문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교황 식스토 4세 역시 공모하였다. 1477년 초 파치 은행의 로마 지점장인 프란체스코 데 파치(Francesco de' Pazzi)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식스토 4세가 피사 대주교로 임명한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 3인은 피렌체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메디치 일가를 몰아낸 후 피렌체의 정권장악을 최종목표로 정했다. 기본 계획은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동시에 암살하고 무력으로 의회와 행정부를 전복시킨 후 정권을 찬탈하는 것이었다.[4]:131

누적된 불만[편집]

은행가인 파치가문은 11세기부터 피렌체에서 군림해온 전통의 명문가문이었으나 14세기 들어 급부상한 신흥 메디치 가문이 통치가문으로 군림하면서 불만이 많았다. 파치 가문의 일원들은 메디치 가문을 물리친 후 자신들이 피렌체의 통치 가문이 되길 원했다. 삼촌인 교황 식스토 4세 덕분에 이몰라(Imola)의 영주가 된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작은 지역의 영주로 만족하지 못했으며 메디치 가문이 있는 이상 이몰라조차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으로부터 피사 대주교로 임명받았으나 메디치가의 로렌초로부터 임지 입성을 거부당한 프렌체스코 살비아티는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피렌체의 대주교가 되고자 했다.

교황의 묵인[편집]

기본적인 계획이 수립되자 교황에게 알렸고 교황 식스토 4세는 간접적으로 전략적 지원을 약속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이 성직자로서 살인을 지지하거나 승인할 수는 없다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하며 피렌체에서 메디치가문이 제거된다면 큰 이로움이 있을것이라고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이번 계획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또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3]:254 교황은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 하였다. 주모자들은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를 포섭하여 합류시키는등 몇몇 반 메디치 성향의 사람들을 추가적으로 끌어들였다.

2004년에 우발디니 가의 문서 보관소에 있는 암호화된 문서가 발견 및 해독되었는데, 인본주의자이자 교황청콘도티에로로 알려진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이 음모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고, 때에 맞춰서 피렌체 외각에 병력 600명을 배치시켰다는 것이 밝혀졌다.[9][10]

실행[편집]

암살과 쿠데타의 실패[편집]

일요일이였던 1478년 4월 26일에 10,000명의 군중을 뒤로 하고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던 도중 메디치 형제는 습격을 받았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베르나르도 반디와 프란체스코 데 파치에게 칼로 19 차례를 찔렸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대성당 바닥에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그의 형 로렌초는 큰 부상을 당했지만 간신히 현장탈출에 성공했다. 암살과 동시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진행하던 의회와 행정부 장악시도가 실패하면서 최종적으로 이들이 진행한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파치가 음모 사건.png

성난 민중의 즉결심판[편집]

암살사건이 알려지자 흥분한 군중들이 공모자들을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하였고 프란체스코 데 파치와 살비아티를 포함한 다섯 명은 베키오 궁전의 창문 너머로 교수형에 처했다.[4]:140 파치 가의 수장 야코포 데 파치는 피렌체를 탈출했지만 붙잡혀 송환당하였다. 그는 고문 당한 후, 베키오 궁전에서 살비아티의 시체 옆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혔지만, 그의 시신은 파해쳐져 배수로로 던져졌다. 그 후 길거리에서 질질 끌려다니다가 파치 가의 궁정 문 앞에 걸터놓아졌고, 썩어가던 그의 머리는 조롱당하였다. 그리고 나서 아르노강에 던져졌다가 아이들이 이를 건져서 버드나무에 걸어놓아 매로 때리다가 도로 강에 던졌다.[4]:141

로렌초는 군중들에게 많은 공모자들과 혐의자들에 대한 즉결 심판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로렌초는 공모자들의 친척이지만 공모자들에게 속은 식스토 4세의 조카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이 당시 17세)을 구해주기도 했다. 핵심 공모자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수배되었다. 암살 시도가 일어난 4월 26일부터 1478년 10월 20일까지 모두 합쳐 80명이 처형되었다.[11]:456 콘스탄티노플로 달아난 바론첼리는 메흐메트 2세에게 체포된후 압송되었고 1479년 바르젤로에서 처형되었다.[4]:142 1481년 6월 6일 세 명이 더 처형당했다.[11]:456

파치가의 몰락[편집]

파치 가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은 압류당했다. 그들의 가문 명칭과 문장 사용은 영원히 금지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공공 기록에서 제거되었고,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모든 건물과 거리들은 이름이 바뀌었다. 돌고래가 있는 그들의 문장은 모두 지워졌다. 파치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은 누구든지 개명해야 했고, 파치 가와 혼인한 이들은 공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다.[4]:142 로렌초의 누이 비안카와 혼인한 굴리엘모 데 파치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4]:141

여파[편집]

2년간의 전쟁[편집]

교황 식스토 4세는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군중에 의해 효수당한 것에 대해 분노하며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파문과 성무금지령을 내렸다.[12] 교황 식스토 4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한 나폴리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군사 동맹을 맺어, 그의 아들인 칼라브리아 공작 알폰소가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공격하도록 했다. 로렌초는 시민들을 결집시켜 대항하였으나 볼로냐밀라노 등 전통적인 메디치 가의 동맹들로부터 조금의 지원밖에 받지 못한 채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이 내부 권력 분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13], 전쟁은 지속되었다. 2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피렌체는 곧 곤경에 빠졌다.

로렌초는 필사적으로 외교전을 벌여 프랑스,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의 여론이 교황에게 불리하게 흐르도록 노력하였다.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나폴리로 직접 가서 3개월간 볼모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나폴리 국왕과 외교적 교섭을 했고, 마침내 피렌체와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중단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나폴리마저 생각을 바꾸자 교황은 어쩔 수 없이 참회라는 형식적 단계를 거쳐서 피렌체를 용서하고 파문을 철회하였다.[14]

메디치의 권력강화[편집]

파치 음모 사건은 두 가지 면에서 메디치 정권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메디치 가의 지지자들에게 향후 더 큰 정치적 응집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또한 피렌체의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 데 기민한 능력을 발휘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메디치 세력은 대담하게 새로운 개혁들을 감행하였다.[15]:223 로렌초는 통치가문의 실권자답게 좀더 활발한 막후정치를 통해 권력 장악력을 높였고 좀더 강력한 독재체제를 갖추었다. 국제 외교에 있어서는 할아버지인 코시모 데 메디치와 마찬가지로 북부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등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이 이탈리아에 넘보지 못하게 하는 평화 유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예술가를 활용한 외교전과 복수[편집]

파치 음모사건(1478년)과 그로 인한 전쟁이 있었으나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교황 식스토 4세와 피렌체 간에는 다소 힘겹고 어색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황은 너무 오래된 마조레 성당을 철거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성당을 1481년에 완공하였다. 내부벽화 장식을 위해 예술가들을 수배한다는 소식이 들지자 로렌초에게는 이것이 절호의 기회였다. 조상 대대로 후원해온 훌륭한 예술가들을 대거 로마로 보내 교황의 환심을 샀다.

로렌초의 호의와 더불어 보티첼리와 페루지노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예술가의 벽화솜씨에 교황은 매우 만족했다. 그러나 로렌초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파견한 예술가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교황과 바티칸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활용하였다.[16] 특히 파치 음모사건(1478년)의 주범중에 유일한 생존자이자 교황의 조카인 지몰라모 리아리오 백작의 동태를 지속적으로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1488년에 오르시니 가문을 충동질하여 지몰라모 리아리오를 암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파치 음모사건으로 살해당한 동생 줄리아노의 원수를 10년 만에 갚았다.

메디치 출신 추기경 만들기[편집]

파치 음모사건를 겪은 로렌초는 경제와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계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있는 장악력이 필요하다는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동안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종교권력이 창출하는 부를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있음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조국 피렌체를 지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차기 교황후보로 유순한 성품의 조반니 바티스타 키보 추기경을 낙점한 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1484년에 인노첸시오 8세로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미 지난 1482년에 7세의 차남 조반니를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해두었다. 이후 1488년 15살인 딸 마달레나 데 메디치(1473-1528)를 38살된 교황의 사생아 프란체스케토 키보(1450-1519)와 정략 결혼을 성사시켰다.[17] 지참금으로는 4,000 두캇을 들려보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1492년 3월 23일 16세의 차남 조반니를 추기경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렌초는 보름후 4월 8일에 4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로렌초가 자신의 차남 조반니를 교황으로 만들려는 계획까지 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훗날 조반니는 1513년에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되어 메디치 가문 출신의 첫 교황이 되었다. 또한 파치 음모사건(1478년)때 암살당한 로렌초의 친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는 줄리오라는 사생아가 있었는데 로렌초가 줄리오를 가문의 일족으로 거두어 들여 잘 양육하였다. 아버지 같았던 백부의 기대에 부응한 줄리오는 훗날 1523년에 219대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문화에서[편집]

공모자들인 프란체스코 데 파치(Francesco de' Pazzi), 베르나르도 디 반디노 바론첼리(Bernardo di Bandino Baroncelli), 살비아티 대주교, 레나토 데 파치(Renato de' Pazzi), 메세르 야코포 데 파치(Messer Jacopo de' Pazzi), 안토니오 마페이(Antonio Maffei), 스테파노 데 바뇨네(Stefano de Bagnone)는 피렌체 정부 청사의 일부인 바르젤로의 벽과 도가나 벽에 그려진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에는 그들의 교수형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교황 식스토 4세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 그림들을 없애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그들은 마침내 1494년에 메디치 정권이 무너진 후, 이를 없애버렸다.[18]:135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희곡 《La congiura de' Pazzi》(1787년 첫 공연, 1789년 첫 인쇄)는 이 음모를 바탕으로 한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메디치(I Medici)》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19]

각주[편집]

  1.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155 페이지
  2.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156 페이지
  3. Vincent Cronin (1992 [1967]). The Florentine Renaissance. London: Pimlico. ISBN 0712698744.
  4. Christopher Hibbert (1979 [1974]). The Rise and Fall of the House of Medici. Harmondsworth, Middlesex: Penguin. ISBN 0140050906.
  5.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144 페이지
  6. 크리스토퍼 히버트<메디치 가 이야기> 164페이지
  7. 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492페이지
  8. 크리스토퍼 히버트<메디치 가 이야기> 164페이지
  9. Marcello Simonetta, The Montefeltro Conspiracy: A Renaissance Mystery Decoded, Doubleday (2008) ISBN 0385524684
  10.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146 페이지, 코네티컷 주 웨슬리안 대학교수인 마르첼로 시모네타는 우르비노의 어느 개인 서고 안에서 조사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이 문서는 파치 음모 사건이 발생하기 두 달 전에 용병대장 몬테펠트로가 1478년 2월 14일에 바티칸으로 보낸 암호편지였다.
  11. Nicholas Scott Baker (2009). For Reasons of State: Political Executions, Republicanism, and the Medici in Florence, 1480-1560. Renaissance Quarterly 62 (2): 444–478. (구독 필요).
  12. 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494페이지
  13. 크리스토퍼 히버트<메디치 가 이야기> 165페이지, 1476년에 로렌초의 굳건한 동맹자였던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암살당하였고 밀라노는 내부 권력투쟁에 휩싸였다. 로렌초는 밀라노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4.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교황들> 156 페이지
  15. Nicolai Rubinstein (1997) The government of Florence under the Medici (1434-149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6. 네이버 캐스트 <미술 컬렉터로 보는 문화사> 로렌초 데 메디치 中에서
  17. 존 줄리어스 노리치<교황연대기> 495페이지 바다출판
  18. Lauro Martines (2003) April Blood: Florence and the Plot Against the Medici.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176094. pp. 187-196. Tobias Daniels: La congiura dei Pazzi: i documenti del conflitto fra Lorenzo de’ Medici e Sisto IV. Le bolle di scomunica, la “Florentina Synodus”, e la “Dissentio” insorta tra la Santità del Papa e i Fiorentini. Edizione critica e commento, Edifir, Florence 2013, ISBN 978-88-7970-649-0
  19. Michele Girardi. Medici, I. In: Stanley Sadie (ed.) The New Grove Dictionary of Opera. Grove Music Online. Oxford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Accessed May 2015. (구독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