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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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비고 제2편]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동국여지비고 제2편]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 각주 ==
<references/>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2024년 3월 15일 (금) 13:58 판

무계정사

꿈속 도원과 비슷한 자리라고 생각한 곳을 찾아내어, 지리와 복서(卜筮)에 뛰어났던 이현로(李賢老)로 하여금 터를 보게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용이 일어날 땅(旁龍所興)’ 이라 하여 별당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 이때가 세종 29년(1447) 8월 30일인데, 태조 5년(1396)에 세운 도성의 정문 숭례문(崇禮門)이 비좁고 남루하여, 왕은 좌참찬 정분(鄭笨)에게 명 하여 숭례문을 대대적으로 개축(改築)하게 되는데, 분(笨)은 신작이라 기록된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하였고, 용(瑢)[1]은 친분이 두터웠던 분(笨)에게 장인(工匠)과 재목및 기와를 요청하니, 분은 선공 부정 이명민을 시켜 숭례문을 완공한 후 남은 자재로 도성 밖 부암동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세워주어, 만여권의 책을 갖추고 또 마포 용산강(龍山江)위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여러 선비들과 시화를 즐겼다. 특히 안평대군과 또래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등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절친한 사이이기에 같이 어울려 시회(詩會)를 즐겼으며, 특히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후(1450)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서 21명의 문사들과 치지정(致知亭)에서 몽유도원도를 감상 하면서,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시(詩) 한수를 지어 붙이는데, 자리를 같이한 문사들의 찬문을 이어받았다.

무계정사를 지은지 3년이 지난 단종 1년(1453) 9월 5일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시켜 선공 부정(繕工副正) 이명민(李命敏)에게 목수를 청하나 이를 거부하게 되니 한명회가 희롱하기를 "네가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위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세웠고, 또 담담정(淡淡亭)을 용산강(龍山江) 위에 지었으며, 또 김정승[2]을 위하여 별실(別室)을 짓는 데에 재목과 기와를 운반해 주고, 집을 얽고 담을 바르는 일을 일찍이 어렵지 않게 하였는데, 같은 왕자인데 홀로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는 어찌하여 한 장인(匠人)을 아까와하는가?" 하니, 이명민이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안평 대군은 일국에서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양 대군 같은 이는 비록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내게 어찌하겠는가?" 한명회가 당시 공조판서보다 실권이 막강한 이명민을 떠보는 내용이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한달 전 일이다.

[동국여지비고 제2편]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같이 보기

  1. 안평대군
  2. 김종서